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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슬픔은 지겨운 것도, 잊는 것도 아니라서

영화 - 존 카메론 미첼 감독, <래빗홀> (2010)

2015-06-08     원대신문

   

 

   어제 있던 일이 일주일 전의 일이 되고 한 달 전, 반년 전, 그리고 기어이 1년 전의 일이 된다. 꽃노래도 식상해져 벚나무엔 잎이 피고, 기쁨은 다른 사람의 일처럼 낯설다. 그런데 슬픔은? 물론 슬픔도 희석되긴 하지만 비커에 떨어진 잉크의색이 모두 사라졌다 해서, 그 물을 맹물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떤 슬픔은 너무 커서 단단한 응어리로 우리 마음속에 가라앉고 '인양' 되지도 않아 오래도록 외면당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응어리를 짊어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한다. 지겹지도 않냐고.
  영화 속 베카와 하위는 겉보기에 아주 평범한 부부다. 하지만 그들은 8개월 전에 사랑하는 아들 대니를 가슴에 묻었다. 하위의 개가 다람쥐를 쫓아 달려갔고, 그 개를 쫓아가던 4살 대니가 개를 피하려던 제임스의 차에 치어 죽은 것이다. 하위는 개를 다른 곳으로 보내고 아들과의 추억  남아있는 집을 팔려고 준비하지만 8개월이 지나도 슬픔은 그대로다. 하위는 여전히 아들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지만, 아내 베카는 그 흔적들이 버거워 어느 날 하위의 허락 없이 아들의 물건을 다 버리고 만다. 부부는 크게 싸우지만 결국 싸움 끝에 내리는 결론은 같다. '우리 탓이야' . 같은 상처를 가진 부부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혹은 아들을 서로 다른 방법으로 간직하고, 보내고 싶어서 서로 상처 입히지만 동시에 그 상처를 보듬고 싶어 한다. 그러나 슬픔은 같은 사건에서 잉태되어도 온전히 주관적인 것이다. 그래서 "내 슬픔도 당신 슬픔만큼 끔찍해! 그냥 우린 다른 곳에 있어" 라는 말은 닿을 수 없어서 슬프다.
   한편 아들을 차로 친 제임스는 오래도록 죄책감을 안고 살고 있고, 아직 학생인 제임스를 베카는 분노가 아닌 동정으로 대한다. 그리고 제임스는 베카에게 자신이 읽고 있는 공상과학 소설에서 영감을 얻어 그린 만화를 보여준다. 래빗홀 어딘가의 우리는 지금과 다른 모습으로살고 있을 거라고, 그리고 우리와 달리반드시 행복한 모습으로 살고 있을 것이라고. 제임스의 만화를 읽으며 베카는 제임스에게 답변이라도 하듯 웃는 듯 우는듯, 그런 표정으로 페이지를 넘긴다. 왜 하필 내가 불행한 버전의 베카로 살고 있냐고 따지고 싶지만 따질 사람이 없어서, 제임스의 집 근처에서 제임스의 행복한 모습을 지켜보던 베카는 소리 없이 절규한다.
   부부의 슬픔은 느리지만, 조금씩 희석된다. 이제 임신한 여동생을 봐도, 어머니의 푸념을 들어도 울지 않는다. 끝까지제임스를 증오하던 하위도 어느 날 제임스의 편지를 뜯어보기도 한다.
   서로의 방법이 달라 래빗홀 반대편에있는 서로의 무게까지 너무나 큰 슬픔 위에 짊어지는 두 부부는 정원에서 오후의 해를 바라보며 손을 꼭 잡는다.
   영화는 슬픔을 강요하지 않고 자극을 주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슬픔을 인정하는 것. 강한 맛의 음식대신 차 한 잔을 건네듯 영화는 조용히 우리에게 말한다. 망각을 강요하는 사람들에게, 슬픔은 잊는게 아니라 그 무게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영화의 말을 빌려 하고 싶다.


배한별(문예창작학과 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