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카지노

제20회 원광김용문학상 당선작 - 소설

2021-11-09     원대신문

특별하지 않은

 한다은(한양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 

 

   선생님, 이거 제가 먹어도 돼요?
 아이의 손끝이 케이크 위 초콜릿을 가리키고 있었다. 익숙한 프랜차이즈 상호명이 새겨진 직사각형의 밀크초콜릿. 먹으면 혀에서 버터가 겉도는 싸구려에 불과한데도, 하나뿐이라는 이유로 특별대우를 받곤 하는 것이었다. 허락을 기다리는 아이의 눈에는 기대가 가득했다. 내가 고개를 주억거리자, 아이는 재빠르게 초콜릿을 집어삼켰다. 토독, 톡. 오물거리는 작은 입에서 경쾌한 소리가 났다. 듣고 있자니 미뤄두었던 식욕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유나야, 우리 어머님이 준비해주신 간식 먹고 마저 공부할까?
 내 말에 아이가 좋다며 몸을 들썩였다. 9살 아이에게 학교공부로도 모자라 집까지 쳐들어온 선생님과 학습지 따위를 푸는 일은 고문일 터였다. 나에게도 반가운 시간만은 아니었다. 적당한 직업을 찾아 적당한 돈을 벌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이토록 사명감 없이 '선생님'이라고 불리고 있다는 사실에 종종 놀랐다. 오늘처럼 이동이 많아 체력적으로 지치는 날이면 그 의구심은 배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일을 하고픈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이들의 기세 좋은 순수함을 상대하는 게 즐겁기는 했다. 옆자리의 아이는 생크림 케이크 한 입만으로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때때로 기분보다도 솔직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크림과 빵이 단정히 쌓인 케이크의 단면을 긁어 입에 넣었다. 너무 달아서 혀끝이 아릴 지경이었다. 이 베이커리의 최악은 케이크라던 동생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동생은 대형 프랜차이즈 베이커리의 아르바이트생이었다. 한참 수험 준비를 할 고등학생이 무슨 돈벌이냐는 나의 반대에도 기어코 찾아낸 일자리였다. 원래는 동의서를 적어주지 않을 작정이었으나, 동생과 부딪힐만한 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동생으로부터 주말에만 일하겠다, 공부와 병행이 힘들면 당장 관두겠다 등의 약속을 받아내고서, 마지못해 미성년자 아르바이트 동의서에 싸인을 했다. 이후로 동생은 주말 아침마다 집을 나섰다. 내가 느지막이 눈을 떴을 때 동생은 이미 없었으므로, 나는 커피를 마시고 평일 동안 어지른 방을 정리하며 홀로 점심시간을 보냈다. 버터와 설탕 냄새를 뒤집어쓴 동생이 돌아오는 것은 2시 30분쯤이었다. 매번 다른 빵이 두어 개 담긴 종이봉투와 함께였다. 나는 동생의 샤워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꼭 동생이 보는 앞에서 그 빵을 먹었다. 그러면 동생도 별말 없이 내 옆에 앉아 TV를 보거나 휴대폰 게임을 했다. 약속이나 다름없이 반복된 2년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동생이 일하는 모습을 상상하기는 어려웠다. 동생은 숫기가 없고 마른 몸에 키만 큰, 전형적인 남고생이었다. 폭신폭신한 빵들 사이, 동생의 정수리가 비죽 솟아있는 풍경은 영 어색했다. 손님에게 살가운 인사를 건네는 말투도 짐작할 수 없었다. 귀여운 연두색 유니폼과 베레모를 처음으로 집에 가져온 날은 그야말로 경악이었다. 동생은 평소 무채색이나 짙은 남색 외의 옷을 전혀 입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는 적잖이 뜨악했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기특한 동생을 괜히 놀려주려는 것처럼 보일까 봐 말을 아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건조대에 널린 유니폼의 깜찍함을 무시하는 것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베이커리 일은 동생의 적성에 맞는 것 같았다. 집안일에도 능한 동생은 손이 야무진 편이었다. 빵을 포장하거나 주방 청소를 도맡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해내리라 싶었다. 오랜 시간을 근무하는 동안 별말이 없다는 점도 그러했다. 별일이 있었다고 해서 나에게 말할 위인도 아니지만, 퇴근 후의 표정이 나쁘지 않다는 게 나로서는 안심이었다. 그래도 나는 동생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 영 불편했다. 돈을 벌겠다는 이유가 내 부담을 덜기 위해서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동생이 아르바이트를 관두겠노라 말했을 때, 나는 이상하리만치 기쁘다고 생각했었다.
 
 거리는 다소 어수선했다. 연말이나 새해를 기념하는 세일 광고와 미처 지우지 못한 어제의 크리스마스 분위기, 지나치게 들뜨거나 지나치게 피로한 사람들이 한데 모여든 탓이었다. 나는 이맘때의 진부함이 어색했다. 달력이 한 장 넘어가는 것만으로 무엇인가 해소될 거란 기대,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두려움과 설렘 같은 것들. 남들보다 조금 느지막이 대학을 졸업하고, 방문교사 일을 시작한 이후로는 '새해'라는 단어에 이질감이 들곤 했다. 내 하루는 늘 비슷비슷한데 남들은 다르기라도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몇 년씩 가르치던 아이가 고학년이 되어 담당할 수 없게 되는 순간이나 학년이 올라가니 교육 강도를 높여 달라는 학부모의 요구를 듣는 것이 나의 새해맞이였다. 한 해 동안 내 옆의 아이가 조금 길쭉해졌음을 깨달으면, 그제야 얼떨떨하게 한 살을 부여받는 식이었다. 늘 자라는 아이들을 상대하는 직업은 내가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일이기도 했다. 산 지 10년도 더 된 옷을 입을 수 있다는 걸, 아이들은 모를 터였다. 모르는 편이 훨씬 나은 것도 같았다.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입어온 카멜색 코트의 옷깃을 여몄다. 오늘 날씨에는 조금 얇은 감이 있었다. 하지만 당연한 추위를 곱씹을 때가 아니었다. 길어지는 상담을 끊지 못해서, 다음 수업시간까지 여유가 없었다.
 시우야, 이번 주도 숙제가 너무 많았어?
 나의 물음에 아이의 뒤통수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나와 아이만이 마주 앉은 아기자기한 방에 적막이 맴돌았다. 거의 뛰다시피 한 탓에 등에 맺혔던 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벌써 4주째 반복된 상황이었다. 함께 풀이하는 하루 분량을 제외하면 새것인 학습지 묶음이 이미 열 개도 더 쌓여 있었다. 아이들이 숙제를 해오지 않는 것쯤이야 익숙했다. 하지만 단순히 놀고 싶었다던가, 하루씩 미루던 분량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늘어났다며 머쓱한 변명을 붙이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 아이처럼 겁에 질린 듯이 입을 다무는 경우는 처음이라 곤혹스러웠다. 학습지의 단계가 적절치 않은 것도 아니었다. 수업내용은 곧잘 따라오는 똑똑한 아이라서 더욱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기야 방문교사를 들이는 데에 아이의 의사가 반영되었을 리 없으니, 하기 싫은 게 이유일 것은 당연했다. 다만 이 아이의 의사 표현 방식이 어딘가 애처롭다는 게 문제였다. 지난주의 상담은 별 효과가 없는 모양이었다. 아이의 엄마를 앉혀 둔 채, 아이가 숙제를 전혀 해오지 않는다고, 이미 삼 주나 그래온 덕에 나는 당신이 준 돈만큼의 일을 하지 않아도 됐다고 말하는 일은 굉장한 고역이었다. 물론 이렇게까지 적나라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학부모 입장에서 교사의 무능함으로 비칠 이야기였다는 것은 분명했다. 어찌 되었건 들이는 돈에 비례하지 못한 교육은 대단한 컴플레인 사안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수업이 흐지부지되는 것을 계속 두고 볼 수도 없었다. 나는 최근 담당하던 수업이 줄어 아이에게 배정된 네 과목도 아쉬운 처지였다. 이러한 시기에 자진해서 학부모에게 밉보이기란 나름의 큰 결심이었다. 아이 엄마의 대답을 기다리는 그 짧은 순간에도, 내 머릿속은 담당 과목 수와 함께 줄어들 월급을 계산하고 있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반응은 다소 냉담했다.
 아직 적응이 필요한가 봐요. 저는 아이 공부를 봐줄 시간이 없어서요. 힘드시겠지만 선생님께서 좀 잘 다독여주세요, 네?
 나는 말문이 막혀 네, 그럼요. 정도의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면 아이와 함께 사는 부모가 몰랐을 리도 없었다. 내가 돌아간 후, 아이에게 약간의 주의를 주는 것으로 이 사태를 마무리하고자 했을 것이다. 어쩌면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을지 몰랐다. 아이는 그 날 내내 엄마의 눈치를 살피다가, 도리어 평소와 다름없다는 사실에 절망했을 터였다. 연약한 일인시위는 소리 없이 묻히기 쉬웠다. 아이들이 못 견뎌서 하는 것은 의외로 체벌보다 묵과였다. 맞지 않는 부품으로 조립한 의자에 앉아서 삐걱거리는 소음을 혼자 견디는 기분 같은 걸, 아이들은 버티지 못했다. 몇 번이고 투정을 부리다가 제풀에 나가떨어지는 순서였다. 부모로서는 신사적이고 확실한 방안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이의 관점에서라면… 나는 여전히 푹 숙여진 아이의 뒤통수를 두어 번 쓰다듬었다. 짧게 다듬어진 머리칼이 까끌거렸다.
 학습지 공부하는 거 싫다고 시우가 엄마한테 말해보는 건 어때? 
 들어 올려진 아이의 얼굴에는 눈물기가 가득했다.
 그래도 엄마가 안 들어줄 것 같아요.
 아이는 소리를 내서 울기 시작했다.
 
 그때의 나는 19살이었다. 내 뜻대로 할 거 아니잖아 하고 퉁명스럽게 말했는지,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거야? 날카롭게 되물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어차피 전부 하고 있던 생각이었으므로, 무엇을 골라 말했든 상관없었다. 다만 엄마의 대답만큼은 또렷하게 생각났다.
 맞아, 이미 결정한 일이야.
 이 집의 어른이자 결정권자는 엄마뿐이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로부터 딱 이주였다. 엄마와 나뿐이던 집이 네 명의 몫이 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엄마의 애인이라는 아저씨는 깔끔한 인상과 다르게 짐이 많아서, 단출했던 살림살이가 두 배보다도 훨씬 늘어났다. 짐은 대부분 브랜드 운동화나 시계, 골프채, 볼링 장비 등 아저씨의 취미생활을 반영한 물건이었다. 그에 반해 아들이라는 아이의 것은 거의 없었다. 아이는 8살이었는데도, 그 흔한 장난감 박스 하나조차 가져오지 않았다. 자잘한 장난감이며 문구류는 이사 첫날 아이가 메고 온 책가방에 든 게 전부였다. 그 외에는 나이에 맞는 동화전집이나 몇 권의 만화책, 잘 세탁된 옷가지뿐이었다. 이 소박한 짐으로는 창고로 쓰던 작은 방조차 실속 있게 채울 수 없었다. 휑한 방에 앉아 있으면, 아이는 지나치게 왜소해 보이곤 했다. 하지만 아이는 바뀐 잠자리를 불평하지 않았고 가리는 음식 없이 깨끗하게 식사했으며 안녕히 주무셨어요, 안녕히 주무세요 하는 인사를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웃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울지도 않았다. 엄마는 이 정도면 내 아이가 아니라도 아주 예쁘다고, 식탁 맞은편의 아저씨를 향해 말했다. 아이는 싱크대에 제가 먹은 그릇을 넣고 막 부엌을 나서는 참이었다. 나는 말 없이 입안의 밥알을 꼭꼭 씹었다. 이렇게 착한 동생 생겨서 우리 딸도 좋을걸. 나중에 듬직하게 크면 누나 지켜주는 건 남동생이지. 엄마의 장난스러운 목소리와 아저씨의 사람 좋은 웃음소리가 집 안을 가득 메웠다.
 또래보다 덩치도 작고 욕심도 작은 아이.
 내가 본 동생의 첫인상은 그랬다.
 아무것도 마음에 들지 않던 날들이었다. 하루아침에 낯선 아저씨와 함께 살게 된 것이며 동생이 생겼다는 것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빠가 죽은 지 15년도 더 지나서야 남편이 필요해진 엄마의 마음이 궁금했다. 처음으로 본 아내로서의 엄마는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덮어두고 행복하기만 한 느낌이었다. 엄마와 아저씨는 CF에나 나올 법한 이상적인 부부 같아 보였다. 나에게는 이전에 목격한 비교 대상이 없었지만, 흔한 결혼 생활과 다른 느낌이라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결혼이 아니라 사실혼이라서 가능한 일인지도 몰랐다. 집들이랍시고 모인 아저씨의 손님들이 꼬부라진 말투로 설명하던 부부 사이 평화의 이유였다. 나는 그때 사실혼이라는 말을 알게 되었다. 어른들의 일이라면 지레짐작이 전부인 나이였지만, 결혼과 다른 이름을 쓰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혼은 참 미묘한 단어였다. 사실은 결혼했다는 걸까, 사실은 결혼하지 않았다는 걸까. 어느 쪽이든 이상했다. 친구들이 전부 수능에 목을 매는 시기에 나는 그런 고민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러한 핑계로 공부를 하지 않는 시간이 늘어났다. 원래도 고만고만하던 성적은 날이 갈수록 바닥을 찍었다. 당연히 엄마는 별말이 없었다. 나도 상관없다는 듯이 굴었다. 그러다가 짜증이 났고, 화가 났다.

   엄마의 컵을 깬 것은 일종의 분풀이였다. 그날따라 식탁 위에 가지런히 놓인 머그컵이 거슬렸다. 나는 고작 물을 삼키다가 사레가 들린 참이었다. 켁켁 대며 목구멍을 달래던 차에 보인 게 그 컵이었다. 컵은 엄마가 오랫동안 사용해온 것으로, 아저씨의 이사 이후에도 바뀌지 않은 몇 개의 물건 중 하나였다. 다소 촌스럽던 우리 집의 물건들은 차례차례 아저씨의 손에 처분되고 있었다. 모던한 라이프 스타일을 추구하자는 선언에 걸맞은 행동이었다. 그러니 이 컵은 엄마가 가진 마지막 꽃무늬일지도 몰랐다. 나는 표면이 반지르르한 잔꽃 무늬를 바라보다가 하얀 손잡이에 손을 욱여넣었다. 손바닥에 닿는 차가운 기운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나는 손을 앞으로 뻗어 발과 조금 떨어진 바닥을 조준했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떨어뜨렸다. 두꺼운 도자기 재질의 몸통이 쉽게 조각났다. 요란한 파열음은 금방 멎었다. 그 자리에 서서 잠시 기다렸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안방의 엄마와 아저씨는 함께 TV라도 보는 중인 모양이었다. 내가 고의로 컵을 깼다는 걸,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게 만족스러웠다. 나는 깨진 머그잔의 잔해들을 뒤로하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사태가 발견된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어머, 이게 뭐니! 엄마의 곤란한 음성이 문 너머로 들려왔다. 나는 무슨 일이냐는 듯 방문을 살짝 열어 고개를 내밀었다. 그런데 상황은 생각보다 더 공교로웠다. 엄마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어지러운 바닥과 엉거주춤하게 선 아이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아이의 조그만 손바닥에는 큼지막한 컵 조각 두어 개가 놓여 있었다.

   네가 깬 거야?

   당황스럽다는 말투였다. 아이는 말이 없었는데, 사실상 범인으로 확실시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나 역시 아이가 왜 저 조각들을 주워 담고 있는지 의아했다. 내 의도와는 다르게 흘러가는 일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의도가 뭐였느냐 하면, 나도 몰랐다. 어차피 바뀔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컵은 그냥 흔한 싸구려 컵이었다. 이제 꽃무늬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제야 나를 발견한 엄마가 혹시라도 설명할 수 있느냐는 눈빛을 보냈다.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아이의 시선이 엄마를 따라 천천히 나에게 옮겨붙었다. 나와 아이가 정면으로 두 눈을 맞춘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이는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아이 같은 얼굴이었다. 아이의 입이 몇 번 뻐끔거리더니, 이내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가 실수로 그랬어요. 죄송해요, 새엄마.

   수업은 중단되고 말았다. 우는 소리에 놀란 아이 엄마가 방문을 두드렸고, 나는 더듬더듬 상황을 설명해야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교사로서 솔직한 견해를 말하는 것뿐이었다. 아이가 적응에 너무 힘들어하니 앞으로의 수업 방향을 다시 고려해보자는 이야기였다. 이 이상 의 수업은 내가 힘들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에둘러 말해도 의도를 감추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아이 엄마는 직접 아이의 공부를 봐주기는 어렵다는 대답만을 반복했다. 서로의 처지만 주장하는 대화가 지루하게 이어졌다. 장장 10분 만에 찾은 합의점이라고는 더 골치가 아픈 쪽이었다.

   그러면 선생님께서 생각해보시고 연락 주세요. 저희는 계속 공부하는 게 좋거든요.

   나는 저희, 라는 단어를 곱씹으며 생각했다. 나에게 결정을 맡기겠다는 말은 결국 본인의 뜻대로 하자는 소리일 터였다. 그러니 나는 충분히 고민하는 ‘척’을 한 후, 저녁쯤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다는 문자를 보내면 될 일이었다. 도통 마음에 들지 않는 마무리에 말을 보태고 싶었지만, 주도권을 빼앗긴 지 이미 오래였다. 지금으로선 밝은 표정을 지으며 물러나는 게 맞았다. 아파트 입구에 서서 긴 한숨 겸 입김을 뱉었다. 잠깐 사이 날이 더 추워진 것 같았다. 다음 주에도 여기를 지나치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지나치게 피곤한 하루였다. 부은 발바닥에서 익숙한 통증이 느껴졌다.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나 왔어.

   돌아오는 기척이 없는 것을 보니, 동생은 집에 없는 모양이었다. 오래 걸리는 외출은 아닌지, 방금까지 사용한 것 같은 가위며 테이프가 널브러져 있었다. 와중에도 큰 짐 박스들은 거실 한구석으로 치워놓은 게, 참 동생답다 싶었다. 동생의 손을 타는 공간은 어디든 깔끔했다.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내가 생각 없이 산 가구들을 단정하게 배치해준 것도 동생이었다. 나는 깔끔함과 영 거리가 멀어서, 여태까지의 정리정돈은 모두 동생의 몫이었다. 그리고 나는 동생이 그런 것을 하지 않길 바랐다. 하지만 말릴 수도, 칭찬할 수도 없었다.

   엄마랑 아빠 중에 누구랑 같이 살래?

   누군가는 살면서 한 번도 듣지 않을 말이었다. 동생은 누군가가 채우지 않은 횟수를 메꾸고 있는지도 몰랐다. 8살의 불행이 17살에 반복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충분히 예상된 일이기도 했다. 엄마와 아저씨의 결혼 생활은 시들해진 지 오래였다. 작은 다툼은 곧 수시로 언성을 높이는 일이 되었고, 서로를 없는 사람 취급하기까지는 몇 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동안 나는 대학을 졸업한 명분상 취업준비생이 되어있었다. 어린아이였던 동생 역시 제법 남자 티가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그래도 나는 우리가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나이 차가 크다는 것을 제외하면, 아주 보편적인 남매 사이였다. 나에게는 동생의 알림장이나 간식을 챙기던 시절이 있었고, 동생도 학교에서 받은 상장들을 내가 가장 먼저 발견할만한 장소에 가져다 놓으며 두 번의 졸업을 겪었다. 내 재수, 삼수 기간의 절반은 육아에 할애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동생은 계속 자라났으므로 나의 도움이 필요한 일은 점점 적어졌다. 그래도 나는 가끔 돈을 모아 동생의 가방이나 신발 따위를 샀고, 동생은 비 오는 버스정류장에서 여분의 우산과 함께 나를 기다렸다. 엄마와 아저씨의 전쟁으로 저녁 식사가 시원치 않으면, 배달음식으로 같이 야식을 먹었다. 여전히 서로의 부모에게 부리는 불필요한 고집을 못 본 채 해주었다. 와중에도 많은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변하지 않았으므로 편안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런 시간을 끝내야 할 때가 왔다는 선고가 내려진 것이었다. 10년 만에 재혼에 성공했다는 동생 친엄마의 연락은 부부가 확실히 갈라설 명분이 되어주었다. 동생의 친엄마는 그간 동생과 함께 못한 시간을 보상해주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경제력도 좋고 또래의 남동생을 가진 남자와 재혼했으니 앞으로 같이 행복하게 살자는 등의 이야기였다. 아저씨는 대수롭지 않게 갑작스러웠을 통화의 요지를 전했다. 엄마도 덤덤하게 그렇구나, 정도의 반응을 보탰다. 나와 동생이 같은 식탁에 앉아 있다는 사실은 상관없는 모양이었다. 이 사안이 결정되는 대로 두 사람 역시 갈라서자는 합의가 곧바로 진행되었다. 선택권은 동생에게 주어졌지만, 아저씨는 반가운 소식을 기다리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미 두 번의 가정을 포기하고서 자식을 돌볼 의지 같은 것은 남지 않은 모양이었다. 평일엔 캐주얼 수트 차림으로 회사에 가고, 주말이면 젊은 동호회 사람들과 볼링이나 골프를 치는 게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일주일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는 동생의 대답에,

   그래, 그런데 많이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니?

   라고 말할 만큼 명쾌한 사람이기도 했다. 나는 처음으로 아저씨가 불편한 게 아니라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저씨는 자신이 지나치게 적게 차지한 불행의 총량을 누가 책임지고 있는지 몰랐다.

   나는 동생의 선택이 유예된 일주일 동안, 집을 떠날 준비를 했다. 어차피 나이도 나이였고,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듯한 집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지금이 여러모로 좋은 타이밍이라는 생각이었다. 꾸역꾸역 얻은 4년제 대학교의 졸업장을 활용해 어떻게든 돈을 벌기로 했다. 그러던 중 구직 사이트에서 본 방문교사 모집 공고는 적절했다. 이메일을 보내기 무섭게 전화가 걸려왔다. 곧 이사 예정이라는 불투명한 계획을 진짜처럼 내세워, 집과 버스로 40분이 넘게 걸리는 지점에서 면접을 봤다. 36÷(9×2)나 왓 이즈 유얼 페이보릿 푸드 등에 답변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후 이틀간의 교육은 구색 맞추기에 지나지 않아서 나는 쉽게 ‘선생님’의 자격을 얻었다. 나름의 직업을 구한 후, 평소처럼 네 명이 모여 앉은 저녁 식탁에서 이야기를 꺼냈다.

   나 취직했어요. 동생이랑 나가서 둘이 살게요.

   나는 일부러 동생이란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 엄마와 아저씨의 젓가락질이 멎었다. 지금 뭐라고…, 되물은 것은 동생이었다. 사전에 이야기된 바 없이 당사자가 된 계획에 많이 놀란 얼굴이었다. 싫은 눈치만 아니라면 상관없었고 다행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동생의 질문을 기점으로, 아저씨는 열띤 반대의 이유들을 쏟아냈다. 네가 돈을 벌면 얼마나 번다고 그러냐, 고등학생씩이나 된 애를 네가 돌볼 수 있느냐, 애 엄마가 잘 키운다는데 무슨 상관이냐 등 어쩐지 성질을 내는 모양새였다. 나는 부부가 이혼하는 일보다 남매가 함께 독립하는 게 더 별난 취급을 받는다는 게 웃겼다. 두 사람의 일은 두 사람의 일이고, 우리는 우리에 불과했다.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사실이었다. 생판 남인 남녀 둘이 동거하겠다는 것과 다름없다는 아저씨의 말을 무시하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엄마, 나 투룸 구해서 나갈 테니까 보증금 좀 빌려줘. 월급 나오는 대로 천천히 갚을게.

   이후로 독립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반대할 것 같았던 엄마는 별말이 없었고, 나로서는 만져본 적 없는 큰돈을 계좌에 넣어주었다. 부동산을 돌아다니다 보면 금방 지나가는 오전과 아이들의 집을 돌며 수업을 하는 오후가 반복되었다. 그렇게 또 한 주가 지나자, 아저씨의 불만도 시들해졌다. 곧 세 개의 집을 골라 동생에게 보여주었다. 동생은 안방이 크고 거실이 넉넉하며 협소한 방을 하나 포함한 투룸을 골랐다. 나는 두 방의 크기가 비슷한 옆 동의 건물이 마음에 들었지만, 군말 않고 동생이 고른 집을 계약했다. 나를 향한 동생의 부채감이 더 커지지 않기를 바랐다. 고마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동생이 말했다. 나는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한 탓에, 너는 앞으로 버스로 통학을 해야 하니 큰일이라고 했을 뿐이었다.

   이삿날 아침이 되어서야 엄마에게 미뤄둔 질문을 할 수 있었다.

   엄마는 왜 갑자기 재혼하고 싶었던 거야?

   이렇게 너도 떠나고 할 테니까…….

   나는 동생을 기다리며 잠시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케이크를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를 축하할 때는 함께 케이크를 먹는 거고, 내일은 동생을 축하할 만한 날인 것 같았다. 수업 내내 입은 세미 정장 대신 두꺼운 추리닝을 챙겨 입었다. 5분쯤 걸어 나가면, 개인이 운영하는 작은 베이커리가 있었다. 맛있고 비싼 케이크로 유명한 가게였다. 맛있다는 점이 중요했다.

   연말이 문제인 모양이었다. 적당한 크기의 케이크는 진작에 팔렸는지 너무 작거나 너무 큰 것들만이 진열되어 있었다. 작으면 축하의 기분이 나지 않고, 크면 다 먹기에 무리가 있을 터였다. 다른 곳에도 가볼까도 싶었지만, 주변에는 동생이 일하는 프랜차이즈 베이커리만 여러 개였다. 내가 한참을 기웃거리자 찾으시는 게 있느냐는 질문과 함께 직원이 다가왔다. 나는 혹시 하는 심정으로 2호 케이크가 있는지 물었다. 직원은 하나가 있긴 하다며 말을 흐렸다. 그러더니 잠시 기다려 달라는 말을 남기고서 가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곧 카운터로 돌아온 직원의 손에는 케이크 박스 하나가 들려있었다.

   저희 남은 케이크가 있는데, 크리스마스에 맞춰 만든 디자인이라서요. 오늘은 이미 26일이잖아요.

   박스 안에서 트리 모양으로 구워진 케이크가 나왔다. 초록색 생크림이 짤주깍지 모양으로 꼼꼼히 채워져 그럴듯한 트리처럼 보였다. 군데군데 박힌 과일은 앵두 전구를 표현한 듯싶었다. 케이크의 꼭대기에는 노란 별 모양의 초콜릿이 크게 박혀있었다. 정말로 크리스마스 단 하루만을 위해 만들어진 디자인이었다. 특별해 보여 마음에 들었다. 어제는 동생도 나도 각자의 일로 바쁜 하루를 보냈으니, 오늘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 케이크를 사야만 할 것 같았다.

   케이크 박스를 쥔 손에 힘을 주며 걸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강한 바람에 케이크의 모양이 망가지는 것은 싫었다. 날은 점점 추워지고 있었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추웠고,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추울 것이었다. 동생은 왜 하필 겨울에 이사를 맘먹었는지 알 수 없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날이 따뜻해지고 봄이 오면 이사하기가 더 쉬울 텐데, 조금만 더 기다리지, 조금만 더…

   동생은 아르바이트를 관둘 거라고 말하는 동시에 혼자 살겠다는 뜻을 밝혔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동생에게서 그런 계획의 낌새를 느낀 적은 없었다. 어쩐지 들떴던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문득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생각해보면 어차피 겪을 시기가 예상보다 빨리 찾아온 것뿐이었다. 동생은 스무 살을 앞두고 있었고 자유롭게 지내고 싶은 게 당연했다. 그런 마음에 관여할 자격이 나에게는 없었다. 나는 집을 구하러 함께 가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허락 같은 뉘앙스의 말을 하지 않기 위해 고르고 고른 대답이었다. 동생은 또 고맙다고 했다.

   집을 계약하는 데에는 반나절이면 충분했다. 동생이 고른 동네는 지금 사는 집에서 버스로 20분이 걸렸다. 이름을 대면 누구나 자취촌이라 여기는 이 동네는, 동생과 비슷한 사회초년생이 몰려드는 곳이었다. 돈을 모았다고는 하지만 동생의 예산은 적었고, 나를 포함한 누구의 도움도 받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 가격대의 집은 다 둘러볼 필요도 없이 비슷했다. 우리는 둘러본 6개 중에 그나마 가구가 새것 같은 원룸으로 의견을 모았다. 집주인은 건물에 관심이 뜸한 사람인지, 계약 내내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집주인의 인감도장은 부동산 중개사의 서랍에 보관되고 있었다. 계약을 마친 동생이 피곤해 보여 택시를 잡을까 했지만, 동생은 버스를 고집했다. 우리는 결국 다시 버스에 몸을 실었다.

   길이 험한 탓에 버스가 제멋대로 흔들리며 나아가는 중이었다. 공교롭게도 승객은 나와 동생이 전부여서, 덜컹거리는 소리 외에는 적막이 맴돌았다. 옆자리의 동생은 창밖을 보고 있었다. 나도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낯선 동네를 훑었다. 저렴한 자취촌인 만큼 구옥들이 늘어서 있었다. 얼핏 어수선해 보였지만, 나름의 규칙으로 관리된다는 게 느껴졌다. 빵빵한 종량제봉투들이 전봇대 아래 옹기종기 놓여 있었으며, 이미 꽉 찬 의류수거함 앞에 단정히 갠 옷들이 쌓여 있었다. 목 늘어난 티에 잠옷 바지를 입은 사람이 골목길의 끝에서 담배 연기를 뿜었다. 한 끼를 때울 만한 아담한 가게가 줄지어 있었고, 빈자리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나는 저 안에 동생이 섞여드는 모습을 상상했다. 동생은 여기에서 밥을 먹고 일을 하고 가끔은 술도 마실 터였다. 담배를 배워 골목을 찾을지도 몰랐다. 5평짜리 원룸에 연인을 초대하는 일도 가능했다. 둘만으로 꽉 차는 방에서, 안도감을 느끼며 사랑을 나눌 수도 있었다. 이런 일들은 전부 동생에게 잘 어울리는 장면이었다. 동생은 이제 스무 살이었으니까. 버스를 타고 20분. 먼 거리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우연히 지날 수 있는 장소도 아니었다.

   나는 창밖에 두었던 시선을 거두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맞은편에서 지금 탄 것과 같은 번호의 버스가 오고 있었다.

   어어!

   지나친 동료에게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으면서도, 버스 기사의 운전은 여전히 거칠었다. 같은 번호 버스 기사들끼리의 친목은 종종 목격하는 일이었으므로, 저것도 일종의 직업윤리인가 싶었다. 그때 동생이 입을 열었다.

   누나. 내가 버스를 진짜 많이 탔잖아, 학교를 버스 타고 다녔으니까. 같은 번호 버스 기사님들이 마주치면 인사하는 거 진짜 많이 봤거든.

   동생은 무릎에 놓인 저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버스가 과속방지턱을 밟은 탓에 앞머리가 펄럭이며 이마가 살짝 드러났다 감추어졌다.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동생이 말을 이어나갔다.

   버스에서 졸면 그런 꿈을 꿨어, 누나랑 내가 같은 번호 버스를 운전하다가 저렇게 인사하는.

   나는 밀려드는 묽은 침을 삼켰다. 문득 작은 방보다 더 작던 동생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머그컵 조각에 베인 동생의 손가락을 훔쳐보던 내 시선이 떠올랐다. 친엄마의 연락을 받은 날, 방문을 비집고 들어오던 동생의 꽉 막힌 울음소리가 떠올랐다. 그걸 몰래 들으며 캄캄한 천장을 바라보던 내가 떠올랐다. 모든 기억은 쌓여서 한데 뭉쳐지지 않고 선명하게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을 나도 모르게 이해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거 재밌다, 재밌었겠네…

   우리는 또 한참을 길에서 같이 덜컹거렸다.

   거실 바닥에 늘어놓은 것들을 정리하던 동생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현관에 서서 손에 든 케이크를 흔들어 보였다. 너 독립 축하 케이크. 내 말에 동생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주방으로 향했다. 내가 뒤꿈치를 비벼 신발을 벗는 동안, 동생이 덜거덕대며 접시며 포크를 챙겼다. 우리는 줄곧 써온 접이식 밥상을 펴고 마주 앉았다. 인터넷에서 싼 것을 찾다 보니 가운데에 조악하고 큰 장미가 그려져 있었는데, 케이크 상자는 그 무늬를 가리는 알맞은 크기였다. 덕분에 파티 테이블 같은 느낌이 나는 것도 같았다. 동생이 보기에는 아닐 수도 있었다. 동생은 케이크를 꺼내더니 이제 와 크리스마스냐며 물었다. 내가 고작 하루 차이는 문제가 아니라고 대답했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여태 동그란 모양의 케이크만 잘라온지라 트리 모양의 케이크를 어떻게 나눠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랑 동생은 이런저런 방향으로 칼을 꽂아보자는 궁리를 했다. 하지만 결국 반으로 가르는 게 최선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두 동강이 나버린 케이크를 보자니 어쩐지 웃음이 났다. 그다지 특별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동생이 반으로 부서져 본래의 별 모양을 잃은 노란 초콜릿을 씹기 시작했다. 토독, 톡. 익숙한 소리였다. 나는 그 소리를 물끄러미 듣다가 남은 반쪽의 초콜릿을 집어 들었다. 아까 보았던 프랜차이즈 케이크와 달리, 상호명이 아닌 크리스마스 문구를 적어둔 모양이었다. 확인할 겨를 없이 내게 남겨진 글자는 메리뿐이긴 했다. 초콜릿은 부드럽고 적절하게 달았다. 케이크는 비싼 값을 하는 맛이었다. 나와 동생은 말없이 케이크를 퍼먹었다. 동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렴 상관없었다. 함께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일이었다. 오늘이라고 다를 필요는 없었다. 나는 이따가 학부모에게 보낼 문자 내용을 생각하며 입술에 묻은 초록색 생크림을 핥았다.

 

 

소설 부문 당선 소감

소중한 칭찬과 응원에 감사드리며
 소설을 쓰는 건 미안해지는 일이구나, 종종 생각합니다. 여기서 슬프다고 또 다른 슬픔을 만들어도 되는지,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슬퍼도 되는지 저는 여전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자꾸 써요. 가장 외로운 이야기를 혼자 두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은 너무 쉽게 들려버리니까, 감추는 동시에 들키기 위해서 썼습니다. 너무 잘 숨어서 술래에게 끝내 발견되지 못한 채 숨바꼭질이 끝나버릴까 봐 조마조마하는 아이. 저는 늘 그런 마음이 됩니다. 
 사실, 오늘만큼 누군가 읽어주었다는 실감이 나는 것은 처음인데요. 저는 단단한 사람이 못 되어서, 늘 칭찬받고 싶습니다. 지나가는 한마디가 저를 향한 애정의 척도인 것처럼 좌지우지되어요. 그러니까 오늘의 경험은, 아주 아끼는 칭찬으로 간직하겠습니다. 읽고 쓰는 일이 멀다고 느껴질 때마다 소중히 꺼내어 볼게요. 또, 아무 말 하지 않음으로써 보내주는 응원에도 감사를 전합니다. 
 슬픔과 사랑이 가까이한다는 걸 잊지 않겠습니다.

 

 

소설 부문 심사평

일상의 변화 혹은 상상력의 확장
 2021년 김용문학상 소설 부문 투고작 수는 예년에 비해 많았다. 그 중 많은 수의 작품이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일상의 변화에 주목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한 관계의 단절이나 생활의 제약 등이, 작게는 모티프 차원에서 크게는 사건의 변화 계기로 작동하였다. 이때 문제적 지점은 학업 및 취업에 대한 스트레스 혹은 부모로 대표되는 사회적 강압 속에서 느끼는 무기력과 좌절 등으로 표현됐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일상에 대한 예민한 고민에서 길어 올린 것이라 더욱 소중했다. 다만 단편소설이라는 미학적 형식으로 정제되기보다는 일기나 수필 정도의 형식에 가깝게 표현되고 있어서 아쉬웠다. 이와는 달리 상상력을 극대화 시킨 판타지 계열의 작품들도 눈에 띄었다. 이 작품들은 모두 재미있었다. 상상력의 기발함으로 초반부에 독자의 시선을 잡아 끌었으며, 이야기 진행의 흡입력으로 독서의 몰입감을 유지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이 작품들은 행동과 사건, 문제와 해결이 중심이 되는 장편의 감각이 두드러졌다. 이 아이디어들을 발전시켜서 장편 분량의 작품으로 완성하면 더욱 빛을 발할 것 같았다.
 이런 연유로 본심에 올라간 작품은 총4편이었다. 「특별하지 않은」, 「줄곧 쌓여 온, 영원하지 않겠지만 오래 남을 것들」, 「방 안에 있는 인물 i」, 「친애하는 인간에게」, 이 작품들이다. 「방 안에 있는 인물 i」는 실험적인 도전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현대인의 주체성을 문제 삼으면서, 현대의 공고한 제도 속에서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이 불가능함을 소설로 형상화하였다. 베이컨의 그림이라는 모티프, 기억상실과 정신적 장애를 겪는 캐릭터, 일상적 현실을 낯설게 보이게 하는 기묘한 분위기의 형성이 흥미로웠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구성이 다소 밋밋해서 독해의 흡입력이 떨어졌다. 「친애하는 인간에게」는 보이스피싱을 당한 대학생이 인간을 불신하고 회의하다가 지하철 화재사건을 계기로 타인을 돕는 경험을 하면서 휴머니즘을 회복하는, 긍정적인 결말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그러나 다소 익숙한 사건 설정 그리고 표면적 사건에서 더 심화되고 있지 않은 문제의식으로 인해 긍정적 결말의 제시가 약간 도식적으로 느껴지는 면이 있었다. 
 마지막까지 고민한 두 작품은 「줄곧 쌓여온, 영원하지 않겠지만 오래 남을 것들」과 「특별하지 않은」이었다. 어느 한 작품을 고르기 어려울 정도로 막상막하였다. 「줄곧 쌓여온, 영원하지 않겠지만 오래 남을 것들」은 부모의 돌봄을 받지 못하고 자란 인물의 성장과 상처를 그리고 있다. 문장, 구성력, 표현에 있어서 탁월한 미학성을 보였다. 그러나 아버지 장만철의 시위 참여와 공적 죽음, 죄책감과 딸의 후일담이 다소 도식적이고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래서 당선작은 「특별하지 않은」으로 정해졌다. 「특별하지 않은」은 재혼 가정의 남매가 대안 가족을 구성하는 이야기다. 정상 가족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이상하고 특별해 보일 수 있는 가족의 구성을 제목 그대로 특별하지 않게 그려내고 있는 담담한 시선이 돋보였다. 가족 관계에서의 상처와 극복 그리고 성장의 모티프가 섬세한 감정선을 통해 이채롭게 그려졌으며, 같은 노선 버스 기사님들의 인사나 케이크 등의 비유를 통해 이런 감정선을 풍부하게 만드는 지점이 인상적이었다. 작위적이지 않고 담백한 문장 또한 매력적이었다. 앞으로도 이상한 것을 특별하지 않게 포착하는 시선과 사유를 통해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균열을 일으키는 작품 세계를 이어나가길 바란다.

심사위원: 정은경(문학평론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이주라(문화평론가, 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