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카지노

제21회 원광김용문학상 당선작 - 소설

2022-11-07     원대신문

커튼콜

변자영(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오래 비어 있던 방에서 사람 사는 티가 났다. 주기적으로 환기를 시키고 청소를 했는지 공기가 쾌적했고 바닥에는 온기가 돌았다. 한쪽 벽면을 꽉 채운 책장에는 대학 입학 전까지 즐겨 읽던 책들이 늘어서 있었다. 캐리어를 구석에 밀어 놓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책들 사이로 간호 서적 몇 권이 눈에 들어왔다. 책상에는 지우개 가루가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었고 침대 위에는 누군가 뒤척인 흔적이 남아 있었다.
 엄마는 해질녘쯤 집으로 돌아왔다. 하얀 간호 셔츠 위에 분홍색 카디건을 걸친 어딘가 낯선 모습이었다.
 "왔니?"
 엄마가 특유의 호들갑을 떨며 나를 껴안았다. 몸 구석구석 상한 데는 없는지, 살이 빠지진 않았는지 꼼꼼히 살피고 나서야 놓아주었다. 그녀는 내 근황을 물으며 능숙하게 밥솥을 열고 쌀을 채워 물을 맞췄다. 아빠 퇴근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던 엄마는 단추를 다시 잠그고 내 앞에 섰다.
 "어때? 예쁘지."
 그녀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엉덩이를 실룩이며 슈퍼모델처럼 거실을 행진했다.
 "잘 어울리네."
 엄마는 배시시 웃고는 도로 간호복을 갈아입으며 일 얘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거기 사람들이 얼마나 웃긴지 아니. 태움이라는 게 있는데, 아주 닦달도 이런 닦달이 없다. 학원 동기 중에 네 또래정도 되는 애는 눈물을 달고 살아. 난 아줌마라 그런지 버틸 만하데. 엄마가 이래봬도 선배님들한테 인기 짱이야. 이것저것 안 가리고 다 하거든. 똥도 나서서 치우고. 그런 건 젊은 애들이 하기 싫어하니까."
 "왜 궂은일을 나서서 해. 몸 좀 사려."
 "이 나이에 사릴 게 뭐 있니."
 펑퍼짐한 옷에 앞치마를 두르자 예전에 매일같이 보던 엄마의 모습이 돌아왔다. 서랍장 맨 아래 칸 깊숙이 간호복을 집어넣고는 된장국을 불에 올렸다.
 엄마는 낮에 요양병원에서 간호조무사 실습생으로 일했다. 돈 한 푼 받지 못하는 일이라 다들 시간 때우기에 바쁜데도 혼자 열과 성을 다하는 모양이었다. 자격증을 따려면 지금부터 네 달은 더 무급 출근을 계속해야 한다고 했다. 그녀는 한껏 들뜬 채 앞으로의 계획을 늘어놓았다. 무사히 실습시간을 채워 자격증을 따고 지금 근무하고 있는 요양병원에 정식으로 취직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날에 다다르기까지 수많은 역경이 예상됐지만 모른 척 맞장구를 쳐 주었다. 엄마가 꿈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듣는 건 로또 이후로 처음이었다.
 "딸, 들어봐. 이번에 까탈스러운 할아버지 한 분이 들어왔는데, 자기가 상전이고 우리는 아랫것인 줄 알어."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이 매번 전화로는 안부만 간신히 묻곤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래도 요즘엔 덜해. 엄마가 비위 맞추는 거 하나는 끝내주게 하잖아. 제 성질을 다 받아주니까 내가 주사 놔주러 가면 좋아해."
 몸이 쑥 밑으로 꺼지는 것 같았다. 엄마는 자랑스럽게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꺼칠한 손으로 수세미를 쥐었다. 그릇들이 시끄럽게 부딪혔다.  
 "우리 막내 소식 들은 거 없니?"
 "이지는 왜? 연락 안 해?"
 "작품준비로 바쁘다고 전화하지 말라네. 엄마가 우리 막내 방해할 순 없잖아."
 엄마는 이지가 말을 배울 때부터 고집스럽게 우리 막내라고 불렀다. 곱상하고 착한, 귀한 우리 막내. 뭐든 잘 하는 복덩이 우리 막내. 차마 뉴욕 시립대에서 공부하고 있을 예쁜 우리 막내가 혜화동 대학로의 내 단칸방에 있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모른다고 둘러댔다.
 "넌 어쩌다 집에서 살기로 했니?"
 더 어려운 질문이 돌아왔다. 마땅한 핑계가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애써 창작의 고통에 빠진 예술가의 고상한 표정을 구현해냈다.
 "작업에 환기가 필요해."
 엄마가 덩달아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람으로 꽉 찼던 집은 이지와 내가 차례로 나가며 텅 비게 되었다. 채광이 좋아 낮이면 집안 구석까지 햇볕이 들어왔지만 특유의 삭막함은 지워지지 않았다. 소파에 가만히 앉아 비어 있는 주방과 거실을 둘러보았다. 이 공간에서 엄마와 아빠 둘이서만 사는 모습이 좀처럼 그려지지 않았다. 네 사람이 모여 앉은 식탁에서 나와 이지를 소거하면 그곳엔 어떤 대화도 남지 않을 것 같았다. 엄마와 아빠의 대화는 항상 우리를 경유하는 방식으로 진행됐고 그들은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계속해서 가족으로 관계했다.
 내가 자취를 결정하면서 가장 걱정했던 것도 바로 이 부분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은 큰 잡음 없이 일상을 계속해나가는 듯했다.
 아직까지 갈라서겠다는 소리는 나오지 않았으니 이정도면 성공한 거 아닐까.
 참는 사람이 있나보지.
 전화기 너머에서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선배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안방에서 알람이 울렸다. 엄마가 반쯤 감은 눈으로 나와 아빠를 깨우곤 밥솥을 열어 남은 밥을 확인했다. 나는 요즘도 엄마가 안방에서 문을 꼭 닫고 락음악을 최대 볼륨으로 키워 들을까 생각했다. 이따금 세찬 드럼소리로도 가려지지 않는 무엇이 있었다.
 아침에 식탁 앞에 앉아 제대로 된 밥을 먹는 게 얼마만인지 몰랐다. 아빠가 국을 한 술 떴다. 엄마는 수십 년간 체화된 곁눈질로 아빠의 표정을 살폈다.
 "일은?"
 "새 작업 들어가려고."
 "벌이는 좀 되나?"
 "주말에 현장 나가서 일 도와주고 있어."
 "내 딸들은 다 돈벌이가 안 되는 걸 붙잡고 있네."
 처음에 내가 연극을 하겠다고 했을 때도, 이지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도 예술가 딸들이 나왔다며 좋아하던 아빠는 갈수록 딸들의 앞날에 안정적인 수입이란 없다는 무서운 사실을 깨달아가고 있었다.
 "왜 회사원 아빠한테서 회사원 딸은 안 나오냐."
 그가 소탈하게 웃었다.
 아빠가 씻으러 들어간 사이 엄마는 나를 조용히 불렀다.
 "밖에 나가서 쓸 거야?"
 이왕이면 집에서 작업하라고 했다. 겸사겸사 택배도 받고 세탁소에서 배달해줄 아빠 옷들도 챙겨달라는 것이다. 나는 새초롬하게 눈을 흘겼다.

 "엄마 한 번만 도와주라."

 그녀가 울상을 지었다.
 아빠가 출근하고 나면 엄마의 손발은 바빠졌다. 못해도 삼십 분 내에 현관을 나서야 제시간에 요양병원에 도착할 수 있다. 아빠의 차가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는 걸 확인하자마자 엄마는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이지가 쓰던, 지금은 아빠가 지내는 작은 방의 침대를 정돈하고 화장실 수전의 물때를 벗겨 반짝반짝하게 광을 냈다. 밀린 설거지를 하고 흩어진 물건들을 정리하고 로봇청소기의 전원을 켰다. 머리에 빈틈없이 구루프를 말고 화장을 하고 옷을 갈아입는 일을 시간 안에 마치는 그녀의 신속함에 혀를 내둘렀다. 엄마는 가슴에 조심스레 명찰을 단 후 현관으로 달려갔다.
 "매일 이러고 살아?"
 "내가 이러고 산다." 

 *

 박득자 씨는 20대를 바쳐온 회사를 결혼과 동시에 그만뒀다. 남들처럼 전업주부로 살면서 아이를 키운 뒤 다시 직장을 가질 요량이었다. 아이가 밥을 먹고 똥을 싸고 숨을 쉬는 것을 하나하나 지켜보다 하루가 사라질 때면 숨이 턱 막혔지만 가슴을 쥐어짜며 버텼다. 유치원 교사가 되는 게 오랜 시간 묵혀온 꿈이었으니 나름 그 꿈을 이룬 거라 생각하며 살았다. 선생이 아닌 엄마가 되었을 뿐이니까. 어쨌든 아이들을 키우니까. 그러나 남편의 짜증과 아이들의 신경질을 모두 감당해내는 것은 그 밖의 일이었다. 일터와 집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 집에서 집에 가고 싶다는 말을 수백 번 읊조리게 되는 것. 눈을 뜨는 순간부터 하루가 아닌 새로운 월요일이 시작된다는 것. 무엇보다 그것이 직업이 아닌 당연한 순리라는, 누군가는 윤리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종종 박득자 씨를 무너지게 만들었다.
 아이들은 빠르게 자랐지만 손 뗄 틈은 쉽게 생기지 않았다. 유치원에 들어간 후에도 아이들은 여전히 집에서 긴 시간을 보냈다. 초등학생이 된 후부터는 학교에서 온갖 가정통신문과 함께 엄마가 집에서 챙겨야 할 일들을 학부모 단체 카카오톡으로 보내주기 시작했다. 알림장을 매일 확인해 주세요 어머님. 일기를 제때 쓰도록 관리해 주세요 어머님. 학부모 총회가 있습니다 어머님. 내일은 학예회 날입니다 어머님.
 혜지엄마 왔어?
 박득자 씨는 그제야 자신이 새로운 이름에 이미 익숙해져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혜지가 중학생이 되면서부터는 시간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식구들이 학교와 회사에 가 있는 낮이면 박득자 씨는 볕이 들어오는 거실 한가운데에 대자로 누워 있곤 했다. 매일 찾아오는 이 시간을 처음에는 어떻게든 알차게 써보려 아르바이트를 찾았지만 시간대가 맞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남편 퇴근 시간과 30분 정도 겹치는 아르바이트 자리도 있었는데, 천양호 씨는 아르바이트라는 말을 듣자마자 펄쩍 뛰었다.
 애들도 안 컸잖아.
 애들은 무서울 만큼 다 컸지만 이 남자가 뭘 알까 싶어 말을 삼켰다. 박득자 씨는 동사무소에서 하는 요가나 꽃꽂이 수업으로 눈을 돌렸다. 뭐라도 배우면 좋지 않을까. 그러나 그녀는 또래의 엄마들로 가득 찬, 서로를 몇 동 몇 호의 누구 엄마로 소개하는 강의실 풍경을 보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쳐 나왔다. 그 속에서 그들과 함께하다 보면 다시는 박득자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았다.
 혜지가 크고 나서는 무언가를 하리라 다짐했다. 그런데 막내가 남았다. 막내가 고등학교에 가면 반드시 무언가 하리라 다짐했다. 그런데 막내가 자퇴를 했다. 막내는 미국으로 갔다. 박득자 씨는 하루의 절반을 집에서 홀로 보냈다. 아침저녁으로 남편의 밥을 챙기고, 시어머니와 박득자 씨의 어머니에게 꼬박 꼬박 전화를 돌리고, 이따금씩 딸 혜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혜지는 바쁜 경우가 많았고 차츰 혜지에게 전화를 거는 횟수를 줄이게 됐다. 막내는 연락이 잘 되지 않았다. 혼자 있는 낮이면 박득자 씨는 텔레비전을 켜 멍하니 채널을 돌렸다. 그러다 보면 세탁기가 울렸고 남편으로부터 오늘 저녁 메뉴를 묻는 전화가 왔다. 수십 년 동안 반복해온 이 이야기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박득자 씨는 이제 텔레비전의 꺼진 화면만 봐도 신물이 났다.
 저 미칠 것 같아요 어머니.
 시어머니는 박득자 씨에게 성당을 다녀보는 것은 어떻겠느냐 물었다. 원래 나이 든 엄마들이 다 그렇게 종교를 찾게 된다고 했다. 그래서 교회고 절이고 아줌마 천지라고 했다. 뭐라도 붙들고 살면 좀 낫다고, 버틸 만 하다고 했다.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다. 매일 하느님과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했다. 대개는 주부반 미사에 맞춰 딸들의 행복, 남편의 행복, 가정의 행복을 빌었다. 가끔 몰래 박득자 씨 자신의 행복도 속삭이곤 했다. 그러다 용돈 5만원을 받아내기 위해 천양호 씨의 눈치를 살피며 그가 좋아하는 된장찌개를 한솥 가득 끓일 즈음, 박득자 씨는 종교를 가져도 해결되는 건 없다는 걸 알았다. 
 하느님이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진 않는다. 기도가 날 먹여살려주진 않는다. 날 이 끔찍한 톱니바퀴에서 끄집어내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그건 오롯이 자신의 몫이라는 걸 박득자 씨는 뒤늦게 깨달았다.

 박득자 씨에게는 일이 필요했다. 가끔씩 천양호 씨 몰래 아르바이트를 다니기는 했지만 그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게 있었다. 
 이 나이엔 보통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많이들 딴대.
 아빠 난리 날 텐데? 그리고 이건 너무 어려워.
 극구 만류하던 딸은 박득자 씨가 간호학원 책자를 내밀자 못 이기는 척 허락해 주었다. 대신 천양호 씨에게는 말하지 않기로 의견을 모았다. 온 힘을 다해 숨기기로 했다.
 말하잖아? 엄마 인생에 직장은 두 번 다시 없어.
 간호조무사가 되기 위해서는 간호학원에서 이론수업을 듣고 요양병원에서 실습 과정을 밟아 자격증을 취득해야 했다. 그러기까지 꼭 이백만원이 들었다. 일을 배우려면 돈이 필요했고 돈을 구하려면 일을 해야 했다. 박득자 씨에게는 전화할 만한 곳이 많지 않았다.
 혹시 모아둔 여윳돈 있을까?
 박득자 씨의 엄마는 답이 없었다.
 내가 결혼하면서 맡겼던 통장은?
 침묵이 불쾌하게 늘어졌다.
 엄마. 딸이 일을 하고 싶단다. 
 엄마. 딸이 자기 인생을 갖고 싶단다.
 엄마. 엄마 딸이 이제 좀 살아보겠단다.
 성철이, 니 막냇동생이 급하게 빌려갔다.
 그 통장은 박득자 씨의 전부였다. 퇴사할 당시 회사를 다니며 차곡차곡 모아둔 돈에 아버지가 결혼 선물로 천을 더해주어 만든 것이었다.
 엄마. 이천이었잖아. 백이 없어? 백도 내겐 줄 게 없어? 이천 중 고작 백도 내게는 줄 게 없어?
 이천은 언제 적 이천. 살면서 조금씩 필요할 때 썼지. 우리 막내가 좀 힘들었냐. 

 * 

 엄마가 수업을 들으려고 하는데.
 응.
 이백이 필요하다네. 교재비하고 강의료 이것저것 해서.
 응.
 어떡할까.
 …….
 그냥 집 보는 게 낫겠지? 네 아빠 눈치도 보이고.
 …….
 말란다. 이게 마음도 편해.
 알았어. 보내줄게.
 …… 네가 돈이 어딨다고.

 그럼 왜 전화를 했어? 왜 하필 내게 전화했어? 혜지는 솟구치는 말들을 내리눌렀다. 이해와 분노가 뒤섞여 자신을 난간 밖으로, 저 아래로 떠미는 것 같았다.

 혜지라는 캐릭터는 참담함을 느끼면서도 결국 해줄 것 같지 선배. 결국엔 자기 비상금 털어서 엄마한테 줄 것 같지. 그렇게 혜지는 이백만큼의 여유와 미래를 잃겠지. 그 여유와 미래를 불쌍한 엄마에게 양도하겠지. 그럼 혜지의 삶은 누가 챙겨줘? 이 마이너스 어떻게 채울 거야? 이 지독한 돌려막기의 시작은 어디야? 

 * 

 선배는 대학로 소극장에서 무대감독으로 일했다. 6주 동안 상연하는 극이었는데 사건사고가 많아 매일같이 죽을상을 하고 다녔다. 배우나 스텝 계약이 엎어지는 건 다반사였고 공연 시기도 여러 번 바뀌었다. 이 극장도 우여곡절 끝에 확정된 곳이었다. 일정 문제로 동시에 두 개의 극을 맡게 된 조명 오퍼 때문에 지금은 내가 주말마다 나가 선배를 도와주고 있었다. 내 역할은 제때에 맞춰 스포트라이트 조명을 움직여 주인공의 얼굴에 쏴 주는 것이었다.
 조명 보조라는 구실을 붙여 데려온 나를 선배는 십분 활용해 알차게 써먹었다. 오늘은 무대에 배경으로 올라가는 인형들의 칠을 새로 해야 했다. 선배와 나는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붉은 페인트로 인형의 벗겨진 부분을 하나하나 덧바르기 시작했다.
 "결말이 안 써져. 시작이랑 끝이 안 나와."
 나는 내 나름의 방식대로 선배를 써먹었다. 학부 시절부터 작가와 연출을 번갈아가며 서로의 작품을 도와주던 우리는 자신의 작품은 몰라도 상대의 작품만큼은 기가 막히게 볼 줄 아는 눈을 가지게 되었다.
 "그냥 확 막을 때려 버려."
 "미쳤니?"
 열다섯 번째 인형의 눈을 공들여 칠하던 선배가 붓을 내려놓고 내가 가져온 원고를 읽었다.
 "그러게 왜 이 이야기를 쓰겠대."
 새 작품을 들어가기로 마음먹고 나서 무엇을 쓸지 오래 고민했다. 다른 이야기를 애써 찾으려 노력했지만 결국 박득자 씨의 이야기가 내게 들러붙었다. 박득자는 수 년 전 이미 쓴 적이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때 결국 손에서 놓았던 이야기를 왜 부득불 다시 끌어오려 하는지 나도 알 수 없었다. 지켜보던 선배는 내게 몇 년 더 간격을 두었다 다시 써보는 것은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그 말을 일단 써보고 생각하겠다는 핑계로 미뤄온 지 벌써 수일이 지났다.
 "선배도 희곡을 쓰잖아."
 "그렇지."
 "선배는 자기 이야기를 쓰잖아."
 "그렇긴 하지."
 "그럼 선배는 선배 이야기를 알아?"
 "글쎄."
 "나는 모르겠거든. 나는 내 이야기를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어."
 "……."
 "그런데 선배, 내가 내 이야기를 모르는데 뭘 쓸 수는 없는 거잖아."
 나는 선배가 부러웠다. 선배는 언제든 능숙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썼다. 적당히 거리를 조절하고 자신이 지나온 삶을 사실에 가까운 픽션으로 바꿔내는 법을 알았다. 나는 선배에게 자주 비슷한 질문을 했다. 
 처음에는 몰라도 썼다. 절박하게 쓰면 내 삶과 글쓰기 중 하나는 알게 된다는 걸 배웠고 나는 도저히 내 삶을 읽어낼 수 없었기에 쓰기 시작했다. 나와 가까이 맞붙은 이야기를 쓰면서 나는 자주 추락했다.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불쾌한 감정이 매번 어김없이 나를 휩쓸었다. 그러다가도 종종 손에 잡히는 순간이 왔고 내 삶의 오돌토돌한 낙차를 어렴풋이 짚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조그만 낙차는 내가 추락하는 순간에만 손에 닿았기 때문에, 나는 계속해서 낙하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저녁 공연이 끝나고 선배와 간단히 반주를 하고 헤어졌다. 바로 집으로 돌아가려다 말고 혼자 살던 방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마로니에 공원에서 도보 십분 거리에 위치한 작은 방은 대학생활을 보내기 편한 곳에서 살겠다는 명목으로 구한 곳이었다. 대학과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학교보다 혜화의 대학로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으니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비밀번호는 그대로였다. 방 안의 불이 다 꺼져 있었다. 스위치를 누르자 엉망으로 어질러진 내부가 드러났다. 침대에도 화장실에도 이지는 없었다. 벽면에 붙어선 이지의 이민가방 위에 선배 연극의 초대권을 한 장 꽂아놓고 나왔다. 
 - 너 없더라.
 집에 도착할 때쯤 이지에게서 문자가 왔다.
 - 헉 미안. 나 저녁엔 이태원에서 일해.

 우리는 유난히 사이가 좋았다. 삼 년 늦게 태어난 이지는 나를 곧잘 따랐고 나도 그런 동생을 챙기는 걸 좋아했다. 같은 집 안에서 같은 걸 먹고 같은 걸 겪으며 자란 우리에게는 함께 공유하는 어떤 공통된 감각이 단단하게 자리해 있었다. 이따금씩 이지가 이 집의 아들로 태어났어도 우리의 사이가 이렇게 좋았을까 고민해보곤 한다.
 집에 엄마도 아빠도 없는 날 우리가 가장 무서워했던 건 인터폰이었다. 택배가 오면 어떡하지. 정수기 기사가 들어오면 어떡하지. 둘만 남겨졌을 때 인터폰이 울리면 우리는 만반의 준비를 했다. 두꺼운 후드티를 뒤집어쓰고 수면바지를 입었다. 이지는 싱크대 서랍에서 과도나 커다란 식칼을 꺼내 꼭 쥐고 붙박이장 안에 숨었다. 그 나이의 우리에겐 무방비한 상태로 낯선 이 앞에서 문을 여는 것만큼 무서운 일은 없었고 때문에 현관문이 완전히 닫히는 순간까지 택배기사가 벌일 수 있는 온갖 일들과 우리의 힘으로 대응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경우의 수를 머릿속으로 그려보곤 했다. 아무 문제없이 칼을 도로 싱크대 밑 서랍장에 밀어 넣을 때마다 우리는 소리죽여 안도했다.
 이지와 나는 사춘기를 겪으며 자연스럽게 거리가 벌어졌다. 작은 집 안에서 벌어지는 비틀어진 이야기들은 알게 될수록 불쾌해졌고 연민과 동시에 강한 거부감이 생겼다. 우리는 매정한 딸이 되기로 했고 우리가 공통적으로 감각하던 모든 것이 끔찍해졌으므로 서로의 감정을 암묵적으로 외면했다. 엄마의 락 음악이 방문 사이를 비집고 나올 때면 애교를 피우던 우리는 언제부턴가 말없이 이어폰을 꼈다. 
 2015년 여름이었다. 살갗이 타들어가는 더위였고 나시탑을 입은 나와 선배는 대학 동기 몇몇과 함께 왼손엔 캔맥주 오른손엔 부채를 쥔 채 퍼레이드 행렬에 뒤섞여 있었다. 경쾌한 아바 노래가 흘러나오는 마지막 트럭은 저 앞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체력이 고갈돼 무리로부터 뒤처진 우리는 점점 뜨거운 아스팔트 위로 녹아내리고 있었다. 함께 퍼레이드의 끄트머리로 밀려난 사람들은 제각각 휴대폰으로 좋아하는 노래를 틀고 남은 힘을 끌어올려 몸을 흔들었다. 그때 앞에서 사람들의 박수소리가 들렸다. 퍼포머들의 춤에 맞춰 박수를 치고 호응을 하고 있었다. 금세 둥그렇게 새로운 무리가 생겼고 사람들이 온 힘을 다해 소리를 지르며 손깃발과 부채를 흔들기 시작했다. 선배가 내 손을 잡아끌고 무리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서 나는 이지를 보았다.
 이지는 SNS에서 희준으로 불렸다. 자기 자신이 지어준 이름이라고 했다. 그날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목이 터져라 노래를 따라 불렀고 환호성을 질렀다. 머뭇거리던 이지도 마저 친구들과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이지가 웃었다. 퍼레이드 한복판의 땀으로 젖은 이지는 그림을 그리는 이지만큼이나 눈부셔 보였다.
 이지는 열일곱에 성정체화를 새로 했다. 자신이 남자에 가깝다는 걸 알았고 그런데도 모두들 이지를 '여자 이지'로 보았으므로 새로운 이름이 필요했다. SNS에서 희준으로 살기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이 불러주지 않는 유령 같다는 사실이 견디기 어려웠다. 이지의 성정체성은 계속해서 변했다. 나중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남자였다가 여자가 되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자신이 남자도 여자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남녀라는 양 극 사이 어딘가에 끼어 있는 존재였고 그런 이지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지는 그것을 이지라고 이름붙이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이지를 이지라고 불렀고 이지도 자신을 이지라고 불렀다. 이지의 애인도, 친한 친구들도 이지를 이지라고 불렀다. 그건 모두 '진짜' 이지였고 이지는 그렇게 자신을 제대로 불러주는 몇몇의 호명에 의지해 살았다. 수많은 빗나간 이지들을 참았다.
 엄마는 그 빗나간 이지를 부르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엄마에게 이지는 언제나 막내딸. 우리 막내. 마냥 소심하고 여린, 그림을 잘 그리는 귀하디 귀한 내 딸.

 일러스트에 재능이 있었던 이지는 미국으로 대학을 갔다. 나는 이지의 유학을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확신을 갖지 못하는 아빠를 설득하고 격려했다. 그러나 나보다 극성이었던 건 엄마였다. 엄마는 세상 끝에 내몰린 사람처럼 사력을 다해 이지의 유학을 추진했다. 막내 하고 싶은 거 하게 해줍시다. 엄마가 아빠에게 자신의 의견을 그렇게까지 강력하게 말한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그로부터 3년 만에 이지가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인천공항에 도착한 이지는 무작정 내게 전화를 했다. 이지는 그새 머리가 짧아지고 문신이 늘어 있었다.
 "엄마는?"
 "모르지. 일 년 더 하고 간다고 그랬어."
 "사실대로 말할 생각은 없고?"
 "이 모습으로 집에?"
 확실히 안 될 말이었다. 
 다행히 이지는 영 대책 없이 온 것은 아니었다. 조만간 작게 온라인 개인전을 준비할 거라고 했다. 별다른 수가 없어 이지에게 대학로의 내 방을 내줬다. 무언가를 빼앗긴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자기 인생을 사는 이지가 좋아 보였고 나는 이지가 이지로 살아가길 바랐다. 

 *

 "비밀의 집이 따로 없네."
 선배가 웃으며 원고를 넘겼다. 글은 마지막 장을 제외하고는 얼추 틀이 나왔다. 선배의 공연도 어느덧 마지막 두 번을 남겨두고 있었다. 
 "들키는 거야?"
 "그래야 삶이지."  "이거 삶 아니야. 연극이야."
 "연극이야말로 현실다워야 한다면서요."
 선배를 따라 2층 콘솔로 올라갔다. 이 위에서 밑을 내려다볼 때면 언제나 감회가 새로웠다. 하나의 작은 인생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리허설에 들어가자 극장 전체가 캄캄해졌다. 무대가 서서히 밝아지고 주인공이 등장하며 첫 장면이 시작됐다.
 "저게 당신의 피조물이군."
 "뭐 그런 셈이지."
 선배가 익살스럽게 귀에 속삭였다. 나는 목장갑 두 개를 겹쳐 끼고 스포트라이트를 잡았다. 손이 조금씩 뜨거워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파트 앞에서 유모차를 끌고 가는 앞집 언니를 보았다. 엄마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그 집 딸이 온다고 했다. 출근 전에 아이를 맡기고 퇴근 후에 도로 데려간다는 거였다. 앞집에는 노부부와 딸, 아들이 살았는데 재작년 자식들이 차례로 결혼해 근처 아파트로 출가한 상태였다. 아이를 데리고 오는 건 딸 혼자만은 아니었다. 맞벌이를 하는 며느리와 아들도 번갈아 가며 아이를 맡긴다고 했다.
 자식들이 출근하고 나면 노부부는 손주들을 맡아 키웠다. 노부부 중 남편은 건너편 아파트단지 경비로 새벽같이 출근을 하므로 정확히는 아내 쪽이 아이들을 돌봤다.
 "사모님도 대단하시지."
 "힘드시겠네."
 그보다 더 무참한 삶도 없을 것 같았다. 엄마는 그래도 덕분에 딸이 회사를 편하게 다니는 모양이라고 했다.
 "너도 애 낳으면 멀리 살지 마."
 또 한 번 몸이 쑥 꺼졌다.
 "알겠지?"
 텔레비전에서 거침없이 하이킥이 나왔다. 요즘 주말이면 하이킥 시리즈를 다시 돌려본다고 했다. 엄마가 내 입에 사과를 밀어넣었다. 나문희 여사가 이순재 씨에게 옷을 사 달라며 아양을 떨었다. 엄마는 입을 크게 벌리고 집이 떠나가라 웃었다.

 그 주에는 집에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작품이 진행되면서 선배와 만날 일이 잦았다. 그날도 박득자 씨의 등장 씬 문제로 입씨름을 하다 지쳐 카페 탁자 위에 엎어져 있었다. 선배가 책상을 두드렸다. 아빠로부터 문자가 와 있었다.
 - 네 엄마 뭐 없지?
 - 왜?
 - 어제 우체국 등기가 반송됐다길래. 
 뒷목이 서늘했다. 동시에 속에서 뜨거운 응어리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말을 오랫동안 골랐다.
 - 있긴 뭐가 있어. 집에서 텔레비전이나 주구장창 보고 앉았지. 그러고 살잖아.
 다 들켰으면 좋겠어. 엄마가 간호조무사로 인정받고 있다는 것도 이지가 자기 인생 잘 살고 있는 것도 다 들켰으면 좋겠어. 그렇게 그 사실을 감당해봤으면 좋겠어. 그러지 못할 거라는 거 알아. 감당하게 되는 건 다른 사람들이 될 거라는 것도 알아. 그래도 연극이니까 감당시킬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어.
 선배가 나를 꽉 끌어안았다. 파동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아빠가 아침부터 소리를 질렀다. 화장실 세면대의 수도관이 역류하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물이 잘 내려가지 않더니 일이 난 것이다. 세면대가 안에 가득 들어차 있던 오물을 울컥 울컥 뱉어냈다. 꼬부라진 머리카락과 알 수 없는 덩어리들이 시커먼 구정물과 함께 세면대 주변에 달라붙었다. 놀라 달려온 엄마가 고무장갑으로 이물질들을 걷어내 변기에 내려 보냈다. 그러나 아무리 치워도 수도관 역류는 멈추지 않았고 세면대에 이어 변기에서까지 끔찍한 악취가 새어나왔다.
 배관공이 오늘 중으로 방문할 예정이라고 했다. 아빠는 엇갈리는 일 없이 집에 잘 붙어 있으라는 당부를 남기곤 나갔다. 엄마가 사색이 되어 나를 쳐다보았다.
 "오늘 회의 있어."
 엄마는 전전긍긍한 채로 출근 시간이 다 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방문을 닫은 채 노래를 틀었다. 그 사이로 불쑥 들어오는 엄마의 초조함이 신경을 긁었다. 엄마가 신발을 신었다 벗는다. 엄마가 주변 사람들에게 전화를 돌린다. 엄마가 화장실 문을 열었다 닫는다. 엄마가 몇 번이고 휴대폰에 아빠의 번호를 입력했다 지운다. 끝내 엄마는 방문을 두드렸다.
 "제발 좀 나가! 나가라고!"
 그냥 명찰 달고 가라고. 왜 그렇게 눈치를 봐? 왜 그걸 내가 느끼게 해? 왜 일을 해도 하필 남의 시중드는 일을 해? 왜 거기까지 가서 사람 눈치를 보고 있어?
 엄마가 빈 동공으로 멍하니 나를 쳐다봤다.

 "그런데 이상하다."
 "뭐가."
 "우리 막내가 연락이 안 돼."
 "바쁜가보지."
 "이상해. 학교에도 전화해 봤는데, 재학생 중에는 없다는 것 같아."

 *

 여느 극처럼 우리 공연도 수십 번의 엎어짐을 가늠하다 끝내 막을 올리게 되었다. 흔쾌히 연출과 무대감독을 맡아준 선배는 바로 이것이 학연지연의 폐해라며 자신을 너무 혹사시키는 것 아니냐고 작업 내내 우는 소리를 했지만 그 덕에 최종고와 장면화 작업이 한결 수월하게 진행됐다.
 무대 위층의 콘솔 옆에 앉아 공연장을 내려다보았다. 긴장감에 얼굴이 노랗게 뜨고 손끝이 식었다. 관객 입장이 끝나자 내부가 천천히 어두워졌다. 불빛 하나 없이 캄캄한 암전. 숨 막히는 침묵이 시작됐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이 두근거림이 설렘으로부터 시작된 건지 두려움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연극이 끝난 후의 나는 지금의 나와 명확히 다를 것 같았다. 선배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호흡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선배가 스텝용 마이크에 대고 말하기 시작하자 그 울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조명, 인."
   환한 빛이 무대를 밝혔다. 저기가 시작이다. 박득자 씨가 고개를 든다. 지독한 낙하가 시작된다. 벅참과 두려움, 후련함 같은 감정과 함께 손쓸 수 없는 참담함이 밀려왔다.
 


소설 부문 당선 소감

모르는 이야기
 「커튼콜」은 20년도 초에 '이상한 낙하'라는 제목으로 썼던 글입니다. 무언가를 이해하기 위해 쓴 글이었습니다. 써야만 했던 글이었습니다. 이 글을 가로질러 살아가고 있는 지금, 돌아보니 그날의 제가 고스란히 이 글 속에 남아 있네요. 작은 연극을 본 것만 같아요.
 늘 써야만 하는 순간이 옵니다. 제 안에서 무언가가 너무 커져서, 그걸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몰라서, 화나 다정 같은 것이 치밀어서, 온통 모르는 것투성이라서 도무지 쓰지 않고는 넘길 수 없겠는 날이 오곤 합니다. 말하는 대신 쓰는 방식으로 삶을 통과해내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을 쓰는 사람으로 보내고 싶습니다.
   막연히 치열하게 썼던 20년의 자영에게, 무대와 문장과 소설 틈에서 다음을 꿈꾸던 자영에게 고맙습니다. 이 소설을 놓지 않게 해준 ≠(inequality)와 정용준 선생님께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함께 쓰고 읽고 울고 웃어주는 모든 사람에게 고맙습니다.
 



소설 부문 심사평

재미와 사유
 2022년 김용문학상에 투고된 소설은 총 12편이었다. 이 중에서 약 8편 정도가 예심을 통과할 정도로, 전반적으로 작품들의 수준이 높았다. 그래서 이번 해 심사는 예심을 두 번에 나누어 진행하였다. 1차 예심을 통과한 작품들을 대상으로 2차 예심을 한 번 더 진행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본심에 올라간 작품은 5편이었다. 수상작은 결국 하나로 정해지지만, 치열한 예심의 과정을 진행하면서, 이번에 투고된 모든 작품들이 모두 매력적이었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코시안, 공룡, 거북, 권투 등의 주요 소재나 모티프들도 신선한 것들이 많았으며, 이러한 새로운 모티프를 판타지나 공포 그리고 SF의 문법을 통해 풀어나가는 방식도 다채로웠다. 무엇보다도 형식적 다양함을 글쓰기와 관계 그리고 가족 혹은 다문화나 퀴어와 같은 사회적 문제로 확장하는 내용의 심도 또한 깊었다. 
 「체커보드사우르스」는 공룡발자국을 찍는 사진사를 중심으로 해체된 가족과 부모의 새로운 결혼에 대한 모티프를 흥미롭게 엮어냈다. 「수평선 너머」는 초월적 세계와 소통하는 존재인 화자가 죽은 친구를 떠나보내는 이야기를 따뜻하게 그려냈다. 「완과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연애를 했던 퀴어 커플의 헤어짐 그 이후에 관한 이야기다. 퀴어 소재를 내세우기보다 관계의 어긋남과 쓸쓸함과 같은 분위기를 섬세하게 다루었다. 이 세 편의 작품 모두 새로운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작품에 몰입시키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가면서 작품의 의미화가 명확하지 않아서 아쉬웠다.
 본심에 올라간 작품은 「사랑의 증명」, 「미켈란젤로가 하품할 때」, 「커튼콜」, 「수상한 세계」, 「.0의 세계」이다. 「사랑의 증명」은 복제인간이라는 SF 소재의 전형적 클리셰에서 벗어나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었다. 원래 살아있던 인간의 성격을 그대로 구현한 복제인간 버전과 가족의 소망을 담아 이상적으로 변형한 버전과의 대립이 흥미로웠다. 하지만 구성이나 밀도에 있어서 다소 성기다는 느낌이 들었다. 「미켈란젤로가 하품할 때」는 거북이의 해방을 통해 부유층의 속물 세계로부터 탈출을 꿈꾸는 아이들의 상상력을 그린 작품이다. 거북이 모티프가 신선하고 문체의 발랄함이 리듬감이 있었으나, 결말의 의미화가 다소 약했다. 「1.0의 세계」는 전망대에서 근무하는 20대 여성의 일상이 그려지는 작품이다. 전망대라는 공간의 분위기, 호소력 있는 문장, 시적인 표현 등이 장점이었다. 하지만 서사성이 다소 부족하였다.
 마지막으로 고민을 한 두 작품은 「커튼콜」과 「수상한 세계」다. 「수상한 세계」는 권투하는 청소년 화자와 그의 할아버지를 통해 세상과 맞장 뜨는 청소년들의 투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힘 있고 간결한 문장으로 사건을 끌고 가는 힘이 강력했다. 문체의 리듬감과 사건 전개의 속도감이 매우 돋보였다. 다만, 화자 및 혜진의 캐릭터가 꽤 익숙해서 매력이 덜했으며, 작품의 의미화 지점이 단순하다는 것이 아쉬웠다. 「커튼콜」은 '나' 자신이 되고자 하는 엄마, 성정체성을 찾아가는 동생의 이야기를 연극하는 '나'의 시선을 통해 설득력 있는 디테일로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억압적 세계 속 정체성의 고민이라는 추상적인 질문을 구체적인 일상의 현실을 통해 그려내었고, 이를 다각적인 시각에서 깊이 있게 의미화시키고 있어서, 단편소설의 본질을 잘 구현하였다. 일상을 섬세하게 분석하는 작가의 시선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며 「커튼콜」을 수상작으로 선정하였다.

심사위원: 이주라(문화평론가, 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정은경(문학평론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