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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벌 단상] 우리에게 결실이라는 것은

2022-11-09     원대신문

 텃밭 농사를 지어본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작물을 거둔 가을 텃밭은 때론 황량하고 쓸쓸해 보입니다. 서리 맞은 고춧대와 호박잎은 축 늘어져 있고, 깨와 콩을 내어 준 깨와 콩의 줄기들은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말라 비틀어져 밭 주변에 쌓인 작물의 잎은 언제 신록의 계절을 살아왔는지 모를 정도로 볼품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존재 이유를 확인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것들입니다. 매운 고추를 달아줬고, 탐스런 호박과 향기로운 들기름을 준 이들이 그들입니다. 하늘과 땅과 인간과 식물이 만들어낸 위대한 결실을 인간은 향유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또 이렇게 이어갑니다.
 가을 텃밭을 보며 책을 생각했습니다. 가을 텃밭을 보며 책을 쓰는 사람들을 생각했습니다. 가을 텃밭을 보며 책을 읽는 행위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결국 모든 것은 연결된다는 자연 생태계의 이치와 책을 쓰고 만들고 읽는 행위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요즘은 스마트폰과 영상매체 탓에 책을 또박또박 읽어내는 일에 많은 어린이와 젊은 세대들이 힘들어 합니다. 궁금한 게 있으면, 유튜브나 인터넷 검색을 하면 되는 것을 굳이 책을 읽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흔하게 듣습니다. 또 책은 자동판매기에 동전을 넣으면 음료수가 툭 튀어 나오듯 펼친다고 해서 곧바로 필요한 정보가 튀어나오지도 않습니다. 지루하고 더디고 답답한 것이 책입니다. 가성비와 효율을 따지는 요즘 세태에 비추어 보면 책은 인기가 없을 만합니다.
 올 봄부터 초여름까지 지독한 가뭄이 전국을 강타했습니다. 저는 밭에 들깨를 심었고, 모두 말라 죽자, 다시 콩을 심었고, 콩도 나지 않아 다시 들깨를 심고 밤늦게까지 물을 길어다 주며 들깨를 살렸습니다. 마트와 인터넷 쇼핑몰에 가면 들깨가루와 들기름은 사방에 널려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심어 만든 음식을 먹고 싶었고, 그 일에 몰두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21세기에 살면서 텃밭 농사는 조선시대와 다르지 않게 지었습니다. 경제성을 놓고 보면 인건비도 나오지 않는 무모하고 바보 같은 짓을 했습니다.
 책을 읽다보면 엉덩이에 땀띠가 나기도 합니다. 6월 말 밭에서 일하다보면 장화에 땀이 고여 양말이 축축하게 젖을 때도 있습니다. 왜 사서 고생을 하는 걸까요?
 인간이 살아온 과정이 바로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좀 더 쉽고 빠르고 이익이 많은 일들을 찾아다닙니다. 하지만 약삭빠르게 찾아다닌 부와 권력과 명예와 위대함이란 것은 알맹이 몇 개를 털어내고 말면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들깻대와 다르지 않습니다. 역사를 이루고, 삶을 일구고, 한 개인의 성취를 이룬 것들은 작은 들깨 알 하나하나가 아닌가 합니다. 그 콩 한 알을 모으고 모으면 한 되, 한 자루가 되는 것이지요. 들깨 한 자루를 쏟아 놓고 물어봅시다. 정말 쉽고, 편하고, 갑자기 벼락처럼 하늘에서 툭 떨어진 것이 한 알이라도 있으면 나와 보라고.
 다시 밭으로 눈을 돌립니다. 스스로 받아서 스스로 키우고 나중에 다 내어주는 밭이 아니고서야 어떤 야채와 곡물을 키워내고 결실을 얻을 수 있을까요? 방치된 밭들은 잠깐 사이에 온갖 풀들이 점령해버립니다. 우리의 손길이 닿아야 하고, 비가 와야 하고, 햇살이 비춰줘야 합니다. 너무나도 자명한 이야기. 우리를 키워주는 마음속 알곡은 선현의 햇살, 사회의 빗물, 거기에 책으로 향하는 우리의 손길로 가능합니다.

정관성 강사(행정언론학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간행물윤리위원회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