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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일리아스>-어떻게 읽고 무엇을 얻을 것인가

세계고전강좌, 다섯째- 강대진 (정암학당 연구원)

2011-03-14     원광대신문

 세간에 나도는 필독도서목록이란 것을 구해보면 거의 언제나 <일리아스>가 맨 앞에 놓여 있다. 하지만, 이미 시도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 작품은 읽기가 어렵다. 사실 이것이 ‘고전’이라고 추천되는 책들의 일반적인 특징인데, 이는 대체로 선생들 탓이다. 책 목록만 던져주고,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는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스스로 작품을 읽겠다는 사람들이 주의할 점을 중심으로 얘기를 풀어보겠다.

 

▲ 기본 정보와 줄거리

우선 기본적인 정보를 확인해두자. 이 작품은 기원전 8세기 희랍(그리스) 땅에서 만들어진 서사시(이야기 시)로서, 현재 남아 있는 것으로는 유럽 최초의 문학 작품이다. 작자는 보통 호메로스라고 알려져 있지만, 이 작품이 한 사람의 것인지, 여러 사람이 거듭 가필(加筆)한 결과인지 여전히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분량은 약 1만 5천 행 정도로 보통 두께의 책 한 권에 다 들어갈 정도이며, 전체는 스물네 개의 권으로 나뉘어 있다.

내용도 간단히 살펴보자. <일리아스>는 트로이아 전쟁을 다룬 작품이지만, 거기에는 저 유명한 ‘트로이의 목마’가 나오지 않으며, 전쟁의 발단이 된 파리스의 판정도 나오지 않는다. 이 작품은 트로이아 전쟁 전체를 다루지 않고, 그 마지막 해에 아킬레우스가 분노한 사건만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용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전쟁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있게 짜여 있다.)

줄거리는 이렇다. 희랍군이 트로이아로 쳐들어간 지 10년째 되던 해, 희랍군의 최고 전사인 아킬레우스는 자신을 무시하는 아가멤논 왕에게 화가 나서 전투를 거부한다. 희랍군은 엄청난 위기에 처하고, 그것을 보다 못해 아킬레우스의 절친한 친구인 파트로클로스가 전투에 참가한다. 하지만 그는 결국 트로이아의 영웅 헥토르에게 죽고 만다. 아킬레우스는 분노의 방향을 헥토르에게로 돌리고, 전장으로 돌아가 친구의 원수를 갚는다. 그는 친구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도 헥토르의 시신을 계속 학대하지만, 헥토르의 아버지가 아들의 시신을 찾으러 오자 결국 그 시신을 돌려보낸다.

 

▲ 작품의 구조

위의 줄거리를 보면 얘기가 간단할 듯하지만, 실제 작품은 훨씬 복잡하게 짜여 있다. 이 작품은 서사시 장르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서사시의 특징은 등장인물이 많고 내용이 복잡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리아스>에 이름이 나오는 인물만도 백 명이 넘는다. 게다가 그 인물들은 그냥 허공에서 튀어나온 게 아니라, 대부분 오랜 이야기 전통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제 나름의 역사를 지닌 인물들이다. 이들 중 다수가 전투 중에 쓰러진다. 그러니 그 전투 장면은 길고 복잡하고, 묘사가 곡진(曲盡)하게 된다. 그래서 기억할 점 하나. 전투장면을 날짜별로 나눠서 보는 것이 혼란을 피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다!

전투가 벌어지는 날은 모두 나흘뿐이다. 전투 첫 날(3권-7권)에는 맨 앞과 맨 뒤에 단독대결이 있고, 중간에는 디오메데스가 대활약을 보인다. 자체적으로 균형 잡힌 날이다. 겨우 한 권(제 8권)만 차지하는 둘째 날은 희랍군이 대패하는 날이다. 다음날(11권-17권)은 희랍군의 우세로 시작해서 전진, 후퇴를 여섯 번 반복하니, 전세별로 나눠보면 좋다. 마지막 날(19권-22권)은 아킬레우스의 출전으로 희랍군이 대승을 거두는 날이다. 뒤의 세 날은 ‘트로이아 승리-각축-희랍군 승리’로 짜여 있다.

기억할 점 둘째 것. 작품 처음의 세 권은, 마지막의 세 권과 짝을 이룬다(이런 것을 ‘되돌이 구성법ring composition’이라고 한다). 첫 권과 마지막 권에는 자식을 찾으러 가는 노인이 나온다. 2권은 전투에 참가할 군대 전체를 조망하고, 23권은 그 동안 나왔던 영웅들을 되돌아본다. (영화의 오프닝 크레딧과 엔딩 크레딧 격이다.) 3권과 22권에는 각각 전쟁을 시작하는 대결(메넬라오스 대 파리스)과 끝내는 대결(아킬레우스 대 헥토르)이 놓여 있다.

 

▲ 서사시의 다른 특징들

<일리아스>, 그리고 그것과 늘 함께 묶여 언급되는 <오뒷세이아>를 읽기 위해 꼭 알아야 하는 다른 특징들이 있다.

1. 이 작품들에는 반복되는 구절이 거듭 나오니, 짜증내지 말 것.

이 작품들은 원래 노래에 얹혀 전해지던 것인데, 가객은 언제나 같은 내용으로 공연한 것이 아니라, 공연 때마다 즉석에서 구절들을 짜 맞춰냈었다. 그래서 공연자는 운율이 맞는 구절들을 외고 있다가 필요할 때마다 거듭 사용하였고, 그 흔적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

2. 옛날 작품이지만 시간적 순서대로 짜여 있지 않으니, 놀라지 말 것.

<일리아스> 맨 앞부분에는 이야기가, 시간적으로 나중인 것에서부터 먼저인 것으로 진행되는 부분이 있다. 또 작품이 시작되면 속도감 있게 중심적인 사건 속으로 돌입하고, 차차 그 앞, 뒤의 일을 채워 넣는 기법이 쓰이고 있다. 그래서 독자들은 뒤로 갈수록 점점 옛날 일과 앞으로의 일들을 알게 되고, 작품이 끝날 때쯤에는 전체를 조감할 수 있게 된다.

3. 문맥과 동떨어진 긴 묘사가 나오면 그 자체로 즐길 것.

이따금 이야기 진행을 방해하는 긴 직유나, 인물 소개가 나온다. 전자는 시인이 그 대목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표시이다. 후자는 대개 단 한 번 등장하는, 죽기 위해 나오는 ‘엑스트라’를 음영 있는 개인으로 만들어주고, 그의 희생을 인상 깊은 것으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또 이 작품은 그 중심적인 흐름에서는 매우 제한된 시간 동안, 제한된 지역에서 벌어지는 젊은 남성 전사들의 전투만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자연 속의 평화로운 일상생활이 배제될 수밖에 없는데, 그런 결핍을 채워주는 것이 바로 직유와 인물소개의 기능이기도 하다.

 

▲ <일리아스>의 의미

한데 이렇게 어렵게 준비해서 작품을 읽을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일리아스>의 큰 의미. 그저 전쟁 얘기인 듯 보일 수도 있는 이 작품은, 옛 사람들이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인간의 운명을 뼈아프게 인식하고, 그것을 받아들인 과정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여신의 아들이면서도 죽어야만 하는 존재였던 아킬레우스는 신과 인간의 경계에 있는 자이므로, 이 운명을 더욱 분명하게 인식하고 거기 격렬하게 반응한다. 그가 그 운명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역시 죽을 운명인 우리로 하여금 자기 연민을 벗어나게 한다. 그는 자기보다 못한 자 아래 종속된 지위도 받아들인다. 분노와 격정을 넘어선 그가 작품 마지막에 보이는 모습은 동료 인간에 대한 동정과 관대함, 배려이다.

그리고 전체성.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의 가슴 속에 있는 분노로 시작해서, 거기서 촉발된 사건을 보여주면서 그로써 트로이아 전쟁의 전말을 모두 보이고, 직유와 인물 소개 등을 통해 평화까지 보이고, 인간들뿐 아니라 신들의 세계까지 그리고 있다. 작은 데서 시작해서 온 우주까지 그 전망을 넓혀가는, 전체성을 추구하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