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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運)의 중립화(中立化)에서 본 공정(公正)과 정의사회(正義社會)

2013-05-26     원대신문

 
 <학술>란에는 원대신문사의 연속기획 <우리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와 글쓰기센터의 연속기획 <세계고전강좌> 원고를 번갈아 싣습니다. 특히 <우리시대 사유의 지평과 미래>에는 2012년 1학기부터 새로 개설된 '글로벌인문학' 강좌의 내용도 게재합니다. 국내외 여러 석학들이 함께 참여하는 이들 연속기획을 통해 인간 이해와 사유의 깊이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에는 크게 나누어 처벌과 관련된 법적 정의, 즉 형사적 정의(Criminal Justice)와 분배와 관련된 사회 정의, 즉 분배적 정의(Distributive Justice)가 있다. 우리의 주요 관심사인 분배적 정의는 사회적 권리와 이익 그리고 부담을 어떻게 나누는 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한 것인지를 다룬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정의(正義)라는 말과 더불어 공정(公正)이라는 말도 쓴다. 그래서 정의사회와 함께 공정사회에 대해서도 이야기 한다. 공정사회가 바로 정의사회인가, 아니면 공정과 정의는 어떻게 다른가, 공정사회에 무엇이 더 보태져야 정의사회가 되는 것인가, 이들 역시 우리의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우리네 인생을 100m 달리기 경기에 비유해 보자. 우리는 모두가 이 경기에서 원점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대부분은 원점에서 출발하지만 일부는 50m 전방에서 출발하고 소수는 95m 전방에서 출발하지 않는가. 또한 달리는 능력도 천차만별이 아닌가 최고로 빠른 사나이 우사인 볼트도 있지만 거북이 보다 느린 사람, 심지어 평생을 가도 골인 지점에 이를 수 없는 장애우도 있지 않는가?
 이렇게 보면 인생이라는 경기는 공정하거나 정의롭다고 할 수가 없다. 인생이라는 경기는 원천적으로 불평등(original inequality)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같은 불평등은 단지 주어진 자연적 사실이고 우연이며 운명일 뿐 그것에 대해 정의 여부를 따질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사실상 도덕판단인 정의 여부는 우리가 그렇게 주어진 자연적 사실, 우연, 운명을 인간적으로 조정하고 시정하는 방식에 대해 부여하는 평가라 생각된다. 그래서 정의로운 행위, 정책, 사회가 있고 부정의한 행위, 정책, 사회가 있게 되는 것이다.
 
 정의와 운의 중립화

 원천적 불평등을 우리는 運(Luck)이라고도 한다. 세상에는 운좋은 사람이 있고 불운한 사람도 있다. 이같은 운을 우리는 복(福)이라고도 한다. 복이 많은 사람이 있고 박복한 사람도 있다. 그런데 운이나 복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사회는 결코 공정한 사회도 아니고 정의로운 사회라고 할 수도 없다. 복불복의 사회는 인간다운 사회라기보다는 주어진 자연질서 그대로 사는 원시의 사회요 야생의 사회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의로운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이같은 운과 복을 어떤 식으로 조정하고 시정해야 하는 것인가?
 운과 복은 우리에게 그냥 우연히 주어진 것이고 그에 대해 우리는 아무 책임이 없고 우리 스스로 선택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운은 도덕적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을 배타적으로 소유할 아무런 정당 근거가 없는 자의적인 것이다. 정의로운 사회란 이같이 정당근거가 없는 자의적인 요소에 맡겨지고 주어진 그대로 방치된 사회일 수가 없다. 정의사회는 우리가 도덕적인 관점에서 모두 합의할 수 있는 정당하고 인간적인 질서를 갖춘 사회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운에는 크게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우리가 타고난 자연적 능력(natural ability)인 자연적 운이다. 지능과 재능 등이 대표적인 것이며 그래서 어떤 이는 천재로 태어나고 어떤 이는 범재 혹은 천치로 태어난다. 또 한가지 운은 사회적 지위(social status)와 같은 사회적 운이다. 어떤 이는 재벌 2세로 태어나고 어떤 이는 거지 2세 혹은 노숙자 2세로 태어난다. 우리가 이같은 두가지 운 즉 자연적 운과 사회적 운을 어떤 방식으로 대우하고 관리하는가에 우리 사회의 정의여부가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정의로운 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이같은 두가지 운의 영향력을 그대로 방치해서는 안되고 그것을 완화 내지 약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운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에게도 책임이 없으며 그냥 공짜로 얻은 것이기에 도덕적으로 그에 대해서 배타적 소유권을 주장할 정당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운을 평준화(equalizing luck)해서 그로부터 나오는 결과를 모두에게 동등하게 나누는 것이 정의로운 것이라 할 수 있는가? 하지만 그것이 정의로운 것일 수 있을지는 모르나 합리적이라 하기는 어렵다.
 능력있는 자, 유능한 자에게 보다 많은 보상을 해서 그 결과로서 사회의 모든 성원들이 보다 유족하고 유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정의의 관점에서 이를 마다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그래서 우리는 운을 평준화하기 보다는 운의 중립화(neutralizing luck)를 통해 모두에게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해법을 찾는 것이 옳지 않는가.
 여기에서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정의의 길은 운을 그대로 방치해서 동물의 왕국으로 가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평준화해서 완전한 평등사회로 가는 것도 아닌 제3의 길 즉 운의 중립화를 통해 적정한 지점까지 운의 영향력을 완화, 조정하는 길이라 생각된다.
 
 기회균등과 공정한 사회

 한 때 미국은 기회의 땅으로 알려져 세게 도처로부터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이민자들이 줄지어 섰다. 미국은 계층이나 사회적 지위가 아니라 노력과 성과에 의해 성공여부가 정해지는 나라이고 개천에서 용이 날수 있는 기회의 나라로 생각되었다. 정의사회를 구상하는 많은 학자들, 국가들도 일단 기회균등이 보장되는 공정한 나라를 목표로 설정했다. 그래서 우리도 지난 정권 후반기에 공정사회 실현을 국정지표로 설정했었다.
 그러나 기회균등을 지향하는 공정사회는 평등을 내세우는 듯한 외양과는 달리 보수적인 함축을 동시에 갖는 이념이라 생각된다. 경기의 기회를 모두에게 균등하게 보장하는 공정사회는 사실상 절차상의 정의(procedural justice)를 강조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정의로운 사회로 가는 필요조건을 충족시킬 뿐 충분조건을 갖춘 사회라 하기 어렵다.
 경기의 공정성은 일단 경기에 참여한 사람들간의 경쟁 절차를 공정하게 관리하며 그래서 경쟁력이 강한 사람이 승자가 되는 것을 보장하고자 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는 자유경쟁시장의 논리를 다른 식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시장은 진입장벽이 높아 많은 사람들이 시장의 게임에 진입할 수 조차 없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부정의는 시장을 자유롭고 경쟁적으로 유지함으로써 시장의 실패(market failure)를 방지하는 문제와 더불어 시장에 진입하지도 못하고 진입해도 도태될 수 밖에 없는 자들을 어떤 식으로 대우할 것인지의 문제와도 관련된다. 그런 관점에서 볼때 기회균등이나 공정의 원칙은 시장기능을 효율적으로 유지하여 경쟁력이 강한 자가 승자가 되게 하는 바 약육강식하는 정글의 법칙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우리 사회와 같이 인종이나 남녀불평등의 폐해가 도처에 누적된 사회에서 기회균등이나 공정의 원칙은 오랜 부정의를 타파하기엔 지극히 소박하고 형식적인 처방이 아니겠는가?
 자유주의적 복지사회가 지향하는 정의는 사회적 운과 우연의 자의성을 완화, 약화시키고자 하는 정책으로 요약할 수 있다. 불운한 가정이나 불리한 계층에 태어났다 할지라도 기초복지로 기본적인 삶을 보장하고 계층에 상관없이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여 사회적 상승을 돕는 공교육 제도를 활성화 함으로써 성공의 기회가 유능한 자에게 열려있는 공정사회 건설이 목표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와 같이 기초복지의 수준이 열악한데다 공교육이 파행으로 치달아 학교가 무너지고 있고 사교육 시장이 번성하는 사회는 기회균등이나 공정사회라는 기본적인 정의마져도 무색한 것이 아닌가?
 
  결과적 정의에 의한 보완

 사회적 운의 영향력을 완화하여 공정사회를 실현하는 것은 그렇다 치고 지능과 재능의 불평등과 같은 자연적 운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또한 사회적 운과 마찬가지로 도덕적 관점에서 볼때 정당근거가 없는 자의적인 것이 아닌가. 사회적 운은 갖가지 제도적 장치에 의해 어느 정도 약화내지 완화할 수 있다 할지라도 자연적 운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가정을 없앨 수 없는 한 우리가 부모로부터 지능과 재능을 실어나르는 DNA를 유전받는 일은 불가피한 일이 아닌가. 우생학적 유전공학에 의해 모든 인간의 유전자를 평준화하거나 격상하는 대책은 어떤가?
 우리가 사회적 운의 영향력을 완화내지 약화하는 일도 만만치 않거늘 자연적 운을 약화내지 완화하는 일은 더욱 가당치 않는 일이 아닌가. 그렇다면 원천적 불평등을 조정하여 인생이라는 경기를 공정한 경기가 되게 하는 공정사회 프로젝트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셈이다. 물론 우리는 절차적 공정성의 확보를 추호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모든 사회의 성원들이 최대의 평등한 자유를 향유하고 사회의 모든 직책과 지위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공정한 기회균등의 보장이 정의로운 사회로 가는 필요조건을 넘어 필수조건임에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도 보았듯 사회적 운을 완화하고 자연적 운을 약화하여 게임의 공정성을 유지하는 절차적 정의관에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래서 이러한 한계에 대해 결과적 정의관에 의거한 보완이 필요하다는 인식에 이를 필요가 있다. 자유경쟁시장은 조만간 독과점에 의해 자유롭지도 경쟁적이지도 않는 시장으로 변하는 시장의 실패를 방지해야 하는 것이 공정성 원칙이 요구하는 바이다.
 그러나 비록 시장이 자유롭고 경쟁적으로 작동한다 할지라도 시장의 결과가 바로 정의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를 정의의 실패(justice failure)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소위 공정사회의 실패로서 공정성이 정의의 필요조건이기는 하나 충분조건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이다. 정의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결과적 정의에 의한 절차적 정의의 보완이 요구되는 것은 바로 이같은 이유 때문이다.
 
 공정, 정의 그리고 운명애

 결국 정의사회는 공정한 게임의 원칙을 세우는 것으로 충족될 수는 없다. 공정성과 더불어 시장 결과를 정의의 관점에서 조정하고 시정하는 결과적 정의의 보완이 필요하다. 이는 결국 사회적 운과 천부적 운에 있어서 가장 불운한 우리 사회의 최소수혜자(the least advantaged)의 운명에 동참해서 그들을 최우선으로 배려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볼 때 정의는 단지 자유나 평등 만으로 설명될 수 없고 그 뿌리에 있어 최소수혜자를 위시한 모든 인간의 운명에 대한 배려, 그래서 인간사랑 즉 박애(fraternity)도 중요시해야 한다는 점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정의와 더불어 그 실천의지로서 사랑을 말한다. 정의는 각자에게 그의 몫을 주고자하는 것이라면 사랑은 각자에게 그의 몫 이상을 주고자 하는 의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각자에게 그의 몫 이상을 주고자 하는 인간사랑을 결여할 경우 정의에 대한 제법한 담론은 물론 정의의 현실적 구현을 위한 실천의지는 물건너 간 것이 되고 만다. 이런 의미에서 정의는 최소한의 사랑이라면 사랑은 정의의 완성이라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황경식 교수(서울대학교 명예교수)
 <필자소개>
 · 1994~현재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철학과 명예교수
 · 1995~현재 명경의료재단 꽃마을한방병원 이사장
 ·저서로 『자유주의는 진화하는가』,『덕윤리의 현대적 의의』,『사회정의의 철학적 기초』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