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언 꺼풀

 강동현(원광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등장인물
 언희 20세
 휘연 29세
 매니저 30세
 할머니 70세

 

 때
 크리스마스이브 밤

 

 장소
 텅 빈 영화관

 

 무대
 중앙에 빨간색 영화관 의자 세 개가 나란히 배치돼 있다. 그 위에는 백열등, 무대 오른쪽 끝에는 초록빛 비상등이 설치 돼있다.

 

 무대, 밝아진다. 자리에 앉아 울고 있는 휘연. 바닥에는 휴지뭉치가 가득하다. 청소도구를 들고 등장하는 언희. 가슴에는 노란 스마일 배지를 달고 있다.

 

 언희, 주변을 서성이다 휘연 에게 말을 건다.

 

 언희 : 저기요.

 휘연 : ······.

 언희 : 저기요!

 

 휘연, 코 푼 휴지를 바닥에 떨어뜨린다.

 

 언희 : (인상을 찌푸리며) 아 씨 더러워···. 저기요, 울보 아저씨!

 휘연 : (울음 그치며) 울보?

 언희 : 쓰레기 치우고 있는 거 안보여요?

 휘연 : 울고 있는 거 안보여?

 

 언성이 높아진다.

 

 언희 : (한숨 쉬며) 보이는데, 보이는데요. 여기 쌓여 있는 쓰레기를 다 치우고 가야 제가 집에 갈 수 있거든요? 이거 다 아저씨가 버린 거잖아요.

 휘연 : 나도 쌓여 있는 거 다 버리고 가야 집에 갈 수 있는데.

 언희 : 그게 뭔데요?

 휘연 : 짐. 아까 영화 끝나고 방송에서 그랬잖아요. 갖고 계신 짐은 버려주시길 바라며, 쓰레기는 잊지 말고 챙겨가라나?

 언희 : 그거 아니에요.

 휘연 : 그거 아니야?

 

 언희, 잠시 목을 가다듬는다.

 

 언희 : (인공지능 목소리처럼) 갖고 계신 쓰레기는 극장 밖 쓰레기통에 버려주시길 바라며, 짐은 잊지 말고 챙겨 가시실 바랍니다··· 거든요? 그리고 아저씨가 무슨 짐을 버리고 있어요. 온통 휴지 쪼가리 밖 없구먼.

 휘연 : 눈물.

 언희 : (어리둥절하며) 눈물? 눈물이 뭐가 짐이에요?

 휘연 : 마음의 짐. 무겁잖아. 갖고 있으면 무거워. 눈꺼풀은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처럼 덜덜 떨리고, 윗입술과 아랫입술은 뭘 그리 내려놓기 싫은지 꾹 잡고 놓아주질 않잖아. 그걸 짊어지고 있으니 엉덩이가 떨어지지 않는 거지.

 언희 :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래서 그렇게 울고 계셨던 거예요? 다 큰 어른이?

 휘연 : (윽박지르며) 참 나, 어른은 울면 안 되는 법이라도 있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휘연.

 

 언희 : (당황하며) 미안해요 미안해. 그냥 신기해서. 그래서 어쩌다 아저씨는 울보가··· 아니 펑펑 울게 된 건데요? 이 영화 별로 슬프지도 않잖아요.

 휘연 : 사연 한번 들려줘? 일단 여기 앉아봐.

 언희 : (중얼거리며) 퇴근해야 되는데···.

 휘연 : 나 놀렸으니까 한 번만 들어줘! 확 컴플레인 걸어버리기 전에!

 

 언희의 팔을 잡아당기며 자리에 같이 앉는 휘연. 언희, 재빨리 뿌리친다.

 

 언희 : (투덜거리며) 알았으니까 말로 해요 말로.

 휘연 : 사실 사연보다는 비결에 가깝지.

 언희 : 비결이요? 눈물 흘리는데 무슨 비결이 필요해요.

 휘연 : 그렇지? 학생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럼 한 가지만 물어볼게. 최근에 마음껏 목 놓아 울어본 적 있어?

 언희 : ······.

 휘연 : 뭐야 정말 없다고? 그냥 찔러본 건데.

 

 휘연, 언희의 옆구리를 찌르는 시늉을 한다. 언희, 몸을 움츠린다.

 

 언희 : (머리를 긁적거린다) 진짜 없는 것 같아요. 제가 미소지기거든요? 그러니까··· 영화관에서 어떤 일을 마주하든, 어떤 진상을 만나든 항상 웃어야 되는 그런 일을 맡고 있어요. 있는데···.

 휘연 : (말을 자르며) 그건 일이 아니지. 일은 말이야, 티켓 예매를 도와준다든가, 팝콘을 튀긴다든가 몸을 쓰는 뭐 그런 거 아니야?

 언희 맞아요. 아저씨 말이 맞는데, 이 일에는 감정도 포함 돼 있다구요. 당신들은 우리가 웃지 않으면 도리어 화를 내. 미소가 묻지 않으면 하대 받는다고 생각하나봐. 그래서 항상 웃어야 된다고.

 

 잠깐의 정적

 

 언희 : 내가 이 얘기를 왜 하고 있지?

 휘연 : 그런데 왜 아까부터 자꾸 슬쩍슬쩍 반말이야?

 언희 : (당황하며) 아저씨도 반말하잖아.

 휘연 : (웃는다) 나는 손님 아니야? 어? 내가 울보라서, 만만해서 그래?

 언희 : 아이 참, 무슨 말씀이세요. 이 아저씨도 진상이네.

 휘연 : 뭐? 진상?

 

 언희와 휘연, 티격태격한다. 매니저가 등장하고 잠깐의 정적이 흐른다.

 

 매니저 : 뭐야, 왜 이리 소란스러워? 안에 사람 있어요?

 언희 : 매니저님, 저에요 언희!

 

 언희와 휘연 에게 다가가는 매니저. 두 손은 주머니에 꽂혀 있다.

 

 매니저 : (쏘아 붙이며) 언희 씨. 아직까지 뒷정리 안하고 여기서 뭐해요? 영화 끝난 지가 언젠데! 보기 좋게 실실 웃을 줄만 알지 느려 터져가지고.

 언희 : 아 그게···.

 매니저 : 그게 뭐?

 언희 : (휘연 가리킨다) 손님이.

 매니저 : 손님?

 

 매니저, 주머니에서 손을 뺀다.

 

 매니저 : 아앗! 손님이 계셨구나. 그런데 저희 직원이 뭐 실수라도··· 그게 아니라면 왜 이 시간까지···.

 언희 : 아··· 이 분이 아까부터 자꾸 울고 계셔서 달래주고 있었어요. (고개 돌려 귓속말 시늉 한다) 정신적으로 좀 아프신 것 같아요.

 매니저 : (목소리가 낮아지며) 울어? 아프셔?

 언희 : 네, 그렇다니까요. (헛기침하며 눈치 준다) 손님, 이제 그만 뚝 그쳐요!

 

 휘연, 매니저와 눈 마주치자마자 억지로 우는 시늉한다.

 

 매니저 : (혼잣말로) 아휴, 다 큰 어른이 저게 뭐람. 아이고, 다 들렸으려나··· 언희 씨 비켜 봐요. 내가 달래볼게.

 휘연 : (언희 팔목을 잡으며) 저리가··· 저리 가라고··· 누나 나 이 아저씨 무서워!

 

 휘연, 코 푼 휴지를 집어 던진다. 뒷걸음치는 매니저. 비명 지른다.

 

 매니저 : (말이 빨라진다) 언희 씨. 그래도 우리손님이니까 얼른 달래서 잘 보내드려요. 나는 마감 안 된 곳이 있어서 어··· 이따 다시 올게요! 항상 웃고! 스마일!

 

 퇴장하는 매니저. 언희, 잠시 숨을 고른다.

 

 언희 : 휴, 갔어요 갔어. 그만 연기해요.

 휘연 : 쳇, 난 눈물연기는 안하는데 학생 때문에···.

 언희 : 봤죠? 손님 앞이라니까 어쩔 줄 몰라 하는 거. 무조건 웃으라잖아. 웃기고 자빠졌네!

 휘연 : 난 눈물연기는 안하는데···.

 언희 : (쿡쿡 웃으며) 그나저나 진상 맞네 아저씨. (휘연을 흉내 내며) 나 무서워!

 휘연 : 뭐? 기껏 구해줬더니만.

 언희 : 아저씨 나랑 더 얘기 하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

 휘연 : ······.

 

 휘연, 일어나 떨어진 휴지 주워 담으며 언희 주변을 빙 돈다.

 

 언희 : 됐고, 그래서 아까 그건 왜 물어본 건데요?

 휘연 : (갸우뚱거리다) 아까? 아, 울어본 적 없냐고? 나도 학생이랑 비슷하거든.

 언희 : 비슷해? 아까 잘만 울더만.

 휘연 : 아니, 무언가로부터 억압당하고 있다는 말이야.

 언희 : 억압?

 

 다시 자리에 앉는 휘연.

 

 휘연 : 크리스마스 캐럴 중에 울면 안돼로 시작하는 그거 알지?

 언희 : (노래 부르며)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산타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게 선물을 안주신대. 그거요?

 휘연 : 그래 그 노래.

 언희 : 그게 뭐가?

 휘연 : 좀 이상하지 않아?

 언희 : 뭐가 이상한데요?

 휘연 : 우는 아이에게는 선물을 안준다니.

 언희 : 안줄 수도 있죠. 말을 잘 들어야 주는 거지 선물은.

 휘연 : 우는 게 말을 안 듣는 거라고 생각해? 그게 나쁜 행동일까?

 언희 : 그건 아니지만··· 어느 부모가 울보아이를 좋아하겠어요? 다들 밝고 씩씩하게만 자라주길 바라죠. 그 보상의 값이 선물이고.

 휘연 : 말이 안 되잖아. 울고 싶으면 울어야지. 그깟 선물 하나 받으려고 자기감정을 숨긴다고?

 언희 그럼 아저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했는데요?

 휘연 : ······.

 

 언희, 깔깔 웃는다. 휘연, 화제를 돌리려는 듯 두 발을 동동 구른다.

 

 언희 : 사람 사는거 다 똑같아요. 그죠?

 휘연 : (헛기침한다) 내 말은, 우리는 어릴 때부터 그런 식의 억압을 받으면서 자라왔다는 거야. 포장된 감정이랑 포장된 선물이랑 거래를 한 격이지.

 언희 : 하긴, 다 큰 어른이 아무도 없는 영화관에 남아서 펑펑 울고 있으면 좀 바보 같아 보이긴 해요.

 휘연 : (화를 내며) 뭐?

 

   언희,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휘연 으로부터 도망친다. 이때 매니저 등장하다 언희와 부딪힌다. 언희, 넘어지고 바닥에 무릎을 찧는다. 짧게 비명 지르며 고개 숙이는 언희. 언희를 부축하기 위해 다가가는 매니저. 휘연은 벌떡 일어나서 가방에서 무언가를 뒤적거리고 있다.

 

   매니저 : 언희 씨, 괜찮아요?

   언희 : ······.

   매니저 : 울어요?

   언희 : (흐느끼며) 아니요. 우는 건 아니고 그냥··· 무릎이 좀 아파서요.

   매니저 : (인상을 찌푸린다) 참 곤란하네. 미소지기가 말이야. 24시간 웃고 있어도 모자랄 판에!

   언희 : (울먹이며) 매니저님. 아파서 눈물이 나오는 걸 어떡해요?

   매니저 : 아파도 참아야죠. 손님도 계시는데 그거 하나 못 참아요?

   언희 : (콧방귀를 뀌며) 제가 AI도 아니고, 웃으라면 웃고 뭐 그런 능력이 있는 줄 아세요?

   매니저 : (언성이 높아진다) 언희 씨는 미소지기잖아요. 미소지기. 평범한 사람이 못하는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언희 씨는 해야 된다고요.

   언희 : 그래요 미소지기··· 미소친구··· 친구한테는 감정도 보이지 마라 뭐 이런 건가요?

   매니저 : 됐고, 잠깐만 기다려 봐요. 반창고 가져올게요. 손님한테 흉한 모습 보이면 안 되니까.

   언희 : (큰 소리로) 매니저님!

   매니저 : (말을 자른다) 근무 중 눈물을 보인 점, 상사에게 대든 점 감안해 미소 포인트 2점 감점할 테니 그렇게 아세요!

 

   매니저, 툴툴거리며 퇴장한다.

 

   바지 한 쪽을 걷는 언희, 다리에는 피가 줄줄 흐르고 있다. 언희, 주변을 둘러보다 바닥에 떨어진 휴지를 발견하고 급하게 집어 피를 닦으려 하다 다시 내팽개친다. 이때, 휘연이 언희 에게 재빨리 다가간다. 휘연의 손에는 생양파 하나가 들려있다. 언희와 휘연, 바닥에 앉아 있다.

 

   휘연 : 아파?

   언희 : ···양파?

   휘연 : 많이 아프냐고.

   언희 : 양파는 뭐냐고요.

   휘연 : (양파를 내밀며) 아 양파··· 양파가 지혈하고 상처소독에 좋대서. 항상 들고 다니는 건 아니고.

   언희 : 고마운데 아까 반창고 가져온다고 했으니까 그거 붙이면 돼요. 괜찮아요.

   휘연 : 반창고는 아픔을 막는거 밖에 안 돼. 제대로 달래줘야지. 기다려봐.

 

   휘연, 언희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양파를 한 겹씩 벗긴다. 훌쩍거리는 소리. 어느 정도 벗긴 양파를 언희의 상처에 갖다 대는 휘연. 언희의 짧은 신음소리.

 

   언희 : 아앗··· 이거 너무 아픈데요?

   휘연 : 가만 있어봐. 피 멈출 때까지 갖다 대고 있어야 돼. 이때다 싶을 때 확 울어버리든가.

   언희 : 네, 뭐가요?

   휘연 : (한숨 쉬며) 모른척하긴. 조금 전 상황만 봐도 딱 알겠던데.

   언희 : (살짝 짜증내며) 뭐가?

   휘연 : 아파도 눈물을 참으라고? 그게 말이 돼? 그게 가능한 사람은 달려라 하니 밖에 없을걸?

 

   언희,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휘연 : 그냥 울라고. 진짜로 몸이 아파서 울던, 마음이 저려서 울던 그건 상관없어. 이유가 뭐가 중요해? 내가 울고 싶다는데.

   언희 : 울보 소리 들어도?

   휘연 : 그게 꼭 나쁜 사람은 아니잖아.

   언희 : 크리스마스선물 못 받아도?

 

   언희와 휘연, 쿡쿡 웃는다.

 

   이때, 훌쩍거리는 소리. 휘연이 한쪽 눈을 비빈다.

 

   언희 : 아저씨는 또 왜 울어? 나 때문에?

   휘연 : 그럴 리가.

   언희 : 그럼 왜 우는데?

   휘연 : 양파 껍질.

   언희 : 아··· 그러게 그걸 왜 까서 그 고생이야. 오늘 눈 제대로 붓겠네. 트리에 방울 대신 눈퉁이 달아놔도 되겠어.

   휘연 : 안 물어봐?

   언희 : 뭘요?

   휘연 : 생뚱맞게 가방에서 왜 양파가 나왔는지 말이야.

   언희 : 그거야··· 워낙 이상한 아저씨니까. 가방 속에서 연탄이 나와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구나 생각할 것 같은데요?

   휘연 : (피식거린다) 뭐?

   언희 : 일단 우리 자리에 좀 앉자. 나 좀 부축해줘요.

 

   휘연, 양파를 다시 가방에 집어넣고, 양손을 털어낸다. 언희, 걷어 올린 바지를 내린다. 휘연, 언희를 일으켜 세우고, 언희는 다리를 절뚝거린다. 자리에 앉는 휘연과 언희.

 

   휘연 : 아까 내가 했던 말 기억나? 무언가로부터 눈물을 억압당하고 있다고 했던 거.

   언희 : (고개를 끄덕이며) 기억나죠. 그게 대충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는것두.

   휘연 : 솔직히 고작 선물 때문이었다면 진작 벗어났겠지. 지금은 다 큰 어른인데.

   언희 : 그럼 지금은 뭐가 아저씨를 옥죄고 있는데요?

   휘연 : 물론 어렸을 때 영향도 컸어. 울면 바보 된다, 특히 사내아이가 눈물을 보이면 어떡하냐··· 이런 말을 많이 들으면서 컸지.

   언희 : 치. 나는 그런 말 안들 은줄 알아요? 어릴 적에 눈물이라도 보여봐. 칠칠치 못하네, 어린 티 못 벗어났네 꾸중만 들었어요.

   휘연 : 이런 말들 성인이 될 때까지 십 년 이 십 년 듣고 있잖아? 그럼 오줌 싼 것 마냥 눈물이 부끄러워진다? 실제로 다른 사람들도 날 안쓰럽게 생각하고.

   언희 : 결국 남의 눈치를 보게 되는 거네요.

   휘연 : 응.

 

   휘연, 가방에서 조금 전 까다 만 양파를 꺼내 두 손으로 조몰락거린다. 언희, 휘연의 양파를 빼앗는다.

 

   언희 : (훌쩍거리며) 정신 사나워! 그것 좀 그만 만져요. 나까지 눈물 나려고 그래.

   휘연 : 미안. 그래서 본론이 뭐냐면··· 어느 순간부터 남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못했어. 아이 때는 부모님 때문에, 사춘기 때는 친구들에게 놀림 받을까봐, 또 군대에 입대해서는 감시대상 될까봐! 그렇게 전역하고 나니까 남은 거라곤 메마른 눈물샘밖에 없더라고.

   언희 : 우리 이모가 그랬는데 어른들이 쉽게 울지 않는 이유는 몸과 정신이 강인해져서가 아니래요.

   휘연 : 뒷말이 대충 예상이 가네.

   언희 : 우는 법을 잊어서래요. 하도 오래 돼서.

   휘연 : (고개를 끄덕인다) 학생 말이 맞아. 우리는 우는 법을 잊어버렸어. 사회 그 어디에서도 우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아. 그래서 나는 생각했어. 억지로라도 명분을 만들자고.

   언희 : 명분?

   휘연, 언희 손에 들려 있는 양파를 빼앗는다.

 

   휘연 : 양파는 말이야. 흙 속에서 자라나기 때문에 몸에 온갖 더러운 것들을 묻힌 채로 수확돼. 그리고 물에 깨끗이 씻겨 지고, 인간에 의해 꺼풀이 한 겹 한 겹 벗겨지지. 그 순간 알리신 이라는 성분이 팡 하고 터지면서 눈물샘을 자극하게 돼. 그래서 울게 되는 거야. 슬픈 감정과는 별개로.

   언희 : 알리신? 꼭 신 같네.

   휘연 : (고개를 갸웃거리며) 뭐? 신 같다고? 신은 신이네. 우리가 못하는 걸 강제로라도 도와주시니까.

   언희 : (두 손을 모으며) 알리신 이시여. 오늘도 풍족한 눈물을 제게 내려주소서!

   휘연 : (웃으며) 푸하하하 뭐예요. 그래서 나는 울고 싶을 때마다 양파를 들고 다녀.

 

   잠시 정적.

 

   언희 : 아무리 그래도 밖에 돌아다닐 때도 들고 다니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요?

   휘연 : 뭐가 이상해?

   언희 : 뭔가 억지 같아서.

   휘연 : 학생, 안경 써?

   언희 : 아뇨. 렌즈 끼는데요.

   휘연 : 그럼 인공눈물 갖고 다니겠네. 인공눈물은 되고, 양파는 안 돼?

   연희 : 그런 억지가…….

   휘연 : 억지 아니야. 둘이 기능도 비슷하잖아. 눈물 촉진!

   언희 : (한숨 쉬며) 그렇다고 해줄게요.

   휘연 : 양파든, 인공눈물이든 외부의 자극을 받아야만 쉽게 눈물이 나오는 세상이잖아. 누가 옆에서 툭 건드려줘야 한다고. 힘겹게 이고 있는 짐을 와르르르 무너뜨려줄 누군가가.

   언희 : 이제 알았다! 아저씨가 혼자 슬픈 심야 영화를 보고 있었던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구만. 쌓이고 쌓인 눈물은 풀어야 겠고, 그렇다고 차마 남들 앞에서 눈물 보이기는 싫고. 맞죠?

   휘연 : 씨··· 이거 보면서 얘기하니까 또 눈물 나려 그런다.

   언희 : 칫. 말 돌리기는··· 아저씨 말 들으니까 뭔가 나도 울컥해지려 그런다.

 

 

   이때, 발소리 들린다. 인기척 느낀 휘연과 언희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옷매무새 가다듬는다.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언희, 소리 나는 쪽을 응시한다.

 

   언희 : 매니저님? 매니저님이세요?

   휘연 : 우리 너무 주책없다. 슬슬 나가야 될 것 같아요. 퇴근 안 해요?

   언희 : (투덜거리며) 조용히 해요.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매니저님? 누구세요?

   휘연 : 누가 오는 것 같으니 일단 나갈 준비 하죠.

   언희 : 그래요. 저도 여기 더 이상 있다가는 미소지기 잘리겠어요. 아니··· 평생 미소를 잃을 듯해요.

 

   휘연의 부축으로 같이 일어난다. 휘연, 양파 챙겨 가방에 넣는다. 언희는 청소도구 챙긴다.

 

   할머니 등장. 할머니의 허리춤에는 동전 주머니, 양손에는 낱개로 포장된 장미꽃 여러 송이가 들려 있다.

 

   할머니 : 장미꽃 좀 사줘!

   언희 : 예?

   할머니 : 장미꽃 좀 사달라니께!

   휘연 : (언희를 보며) 잡상인 할머니인가 봐요. 나가시라고 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할머니 : (버럭 화를 내며) 다 들려 이 눔아!

   휘연 : 아이구. 죄송해요. 귀가 불편하신 줄 알고.

   할머니 : 나 귀 안 먹었어. 귀 먹은 건 자네겠지!

   휘연 : 저요?

   할머니 : 장미꽃 좀 사달라니께 들은 채도 안하잖어! 보아하니 그렇고 그런 사이구먼. 오늘 같은 날에 꽃 한 송이 없어서야 되겠어?

   언희 : (차근차근 내뱉으며) 할머니. 저희는 그런 사이 아니구요. 죄송하지만 여기 이렇게 들어오시면 안돼요. 여기서 장사 하시는 것도 안 되고요.

   할머니 : 알았으니께, 남은 꽃 좀 다 사줘.

 

   할머니, 휘연과 언희의 주변 한 바퀴 돈다. 두 손으로 언희의 어깨를 부여잡는 할머니.

 

   할머니 : 아가씨 울었구먼?

   언희 : 예, 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처음엔 넘어졌다, 혼났다, 양파 까는 얘기 하다가······.

   할머니 : (무시한다) 자네도 울었구먼? 사내자식이 말이여···.

   휘연 : 할머니, 제가 그 말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거든요? 그리고 다른 이유는 없고···

   할머니 : 농담이여 농담. 뭐가 그렇게 변명이 많어? 그냥 울었다고 하면 되지.

   언희 : 쪽팔리잖아요.

   할머니 : (호통 치며) 쪽? 쪽팔려? 웃기고 자빠졌네! 젊을 때 실컷 울어둬들. 늙으면 말이여, 웃음도 눈물도 안 나와. 바닥나 버린 게지.

   휘연 : 어떤 감정이 생기든 무덤덤해진다고요?

   할머니 : 무덤?

   휘연 : (언성을 높인다) 아니, 무덤덤해지냐고요?

   할머니 : 맞아··· 언제 무덤 갈지 모르니까 다 비워놓는 게지. 그러니까 이 장미꽃 좀 사줘.

 

   휘연, 이마를 탁 친다. 언희는 주머니를 뒤적거린다.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두 장을 꺼내는 언희. 선뜻 내밀지 못한다. 이때 휘연이 언희의 등을 떠 민다.

 

   언희 : (휘연을 째려보며) 알았어요 할머니. 그 꽃 제가 다 살 테니까··· 얼마에요? 저 가진 게 지금 이 만원 밖에 없어요.

   할머니 : 괜찮어. 그거라도 줘. 인상은 피고! 누가 보면 억지로 사는 줄 알겠어.

   언희 : 억지 맞잖아요.

   할머니 : (큰 소리로) 다 들린다고!

 

   할머니, 언희와 휘연에게 장미꽃 다섯 송이 씩 손에 쥐어준다.

 

   언희 : 아차. 그나저나 할머니.

   할머니 : 더 사게? 이제 읎어.

   언희 : 아니 할머니!

   할머니 : (짜증내며) 왜?

   언희 : 궁금한 게 있는데요. 평소에도 이런 식으로 장사하세요?

   할머니 : 이런 식? 이런 식이 뭔데?

   언희 : 그러니까 할머니도 손님들에게 꽃을 파는 서비스직이잖아요. 이렇게 불친절하게 장사해도 물건이 팔리냐 이 말이에요.

   할머니 : 팔리지.

   휘연 : 그럼 오늘은 왜 이리 많이 남았는데요?

 

   할머니, 휘연 에게 꿀밤을 때린다. 휘연, 머리를 감싼다.

 

   휘연 : 아, 아파요 할머니!

   할머니 : 내가 뭐 파는 사람 같이 보여?

   휘연 : 장미꽃?

   할머니 : 그려. 나는 꽃만 팔어. 배시시 웃으면서 헤프게 미소 파는 사람이 아니라구. 할미는 그냥 장미꽃만 잘 가꿔서 팔면 돼!

   언희 : 불친절하다고, 상품보다 자기감정이 앞섰다고 안 팔려도 상관없어요?

   할머니 : 물건만 좋으면 됐지. 뭘 그런 걸 따진담?

   언희 : 휴··· 저도 그랬으면 좋겠네요.

   할머니 : 흠, (언희의 왼쪽 가슴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아가씨 사정은 잘 모르겄지만 그거 너무 오랫동안 지고 있지 말어.

   언희 : 네? 그거라뇨?

   할머니 : 미··· 소··· 지··· 기라고 써 있구먼. 시종일관 미소 짓고 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등에 미소를 지고 있는 사람인가?

   휘연 : (끼어 들며) 할머니랑 달리 친절하게···.

   언희 : (말을 자른다) 아니, 할머니 말씀이 맞아요. 너무 오래 들고 있어서 입 꼬리도 허리도 다리도 무뎌졌어요.

   할머니 : (껄걸 웃는다) 그려. 자연스럽게, 뭐든지 자연스러운 것이 좋아!

 

   언희 : 할머니 이제 나가요. 아저씨도 서둘러 나가자. (잠시 정적) 나도 이참에 같이···.

   휘연 : 같이?

   언희 : 그럴까 봐요.

   휘연 : 그만 두고?

   언희 : 다 내려 두고 같이.

   할머니 : 잠깐만 기다려줘, 뒤에 꽃이 더 있어!

 

   할머니, 의자 뒤로 넘어가 숨는다.

   잠시 정적.

   언희, 스마일 배지를 옷에서 떼어 낸다. 휘연은 배지를 빼앗아 바닥에 던져 버린다.

 

   언희 : (당황하며) 뭐해요?

   휘연 : 언희 씨라고 했지? 이딴 배지 달고 있지 마. 그쪽, 너무 꺼풀이 많아. 양파처럼.

   언희 : 그놈의 양파.

   휘연:우리 한 겹 한 겹 벗겨내 보자.

   언희 : 뭐··· 또 울리려고?

   휘연 (피식 웃는다) 일단 더러운 흙부터 털어내고. 가자!

   언희 : 그래, 가자.

 

   이때, 매니저 발 굴리며 등장한다. 스마일 배지가 가득 들어있는 통을 들고 있다.

 

   매니저 : (휘연을 가리키며) 다 들었어! 이딴 배지? 더러워?

   언희 : (한숨 쉬며) 하, 역시 안 되겠지···.

   휘연 : 저기요,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닙니까?

   매니저 : 아까부터 아저씨 뭐야? 손님인 척 우리직원이랑 데이트하고 있었던 거야? 하긴, 손님이 이 시간까지 있을 리가 없지. (호통 치며) 손님 아니네. 당장 나가!

 

   할머니, 매니저에게 살금살금 다가가, 꽃으로 뒤통수를 때린다.

 

   매니저 : (돌아보며) 뭐야?

   할머니 : (귀를 막으며) 시끄러워! 귀 안 먹었으니께 작게 좀 말해!

   매니저 : 할머니? 손님인가? 할머니는 또 여길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할머니 : 응 나도 손님인디.

   매니저 : (위아래로 훑으며) 장사치네. (큰 소리로) 나가요 할머니!

   할머니 : 손님이라니께. 그리고 나갈 거니까 보채지 말어. 하여간 손님들한테만 싹싹하지··· 싸가지.

   매니저 : 뭐라고요?

   할머니 : 됐고, 아가씨! 아까 내 말 명심 혀. 내려놔, 다 내려놓으란 말이야! 그리고 총각은 아가씨 꼭 쥐고 있어줘. 갑자기 놓아 버리면 이리저리 흔들리니께!

 

   할머니, 퇴장.

   매니저, 들고 있던 통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매니저 : (한숨 쉬며) 저 노인네 어떻게 들어 온 거야 도대체! 언희 씨, 상황 설명해봐. 저 노인네며 남자친구며.

   언희 : 그게··· 돌아다니면서 장미꽃을 파는 할머니신데 자정이 넘도록 꽃을 팔지 못하셨다잖아요. 너무 불쌍해서···.

   매니저 : (콧방귀 뀐다) 불쌍해? 불쌍하면 멋대로 우리 영화관 들어와서 물건 팔아도 되는 거야? 갈 곳 잃은 장사치 주제에?

   언희 : 추운데 팔고 빨리 들어가셔야죠.

   매니저 : 너는 이제까지 안 들어가고 뭐하고 있니? 매정하게 내쫓았어야지. 매정하게!

   언희 : 언제는 살갑게 맞이하라면서요?

   매니저 : 그건 손님일 때 얘기잖아! 더 이상은 못 참겠어요. 언희 씨, 오늘 유독 개인적인 감정이 툭툭 나오는데···.

   휘연 : (끼어 든다) 그쪽이야 말로 말을 너무 툭툭 하시는 거 아닙니까?

   매니저 : 뭐요?

 

   매니저, 통을 발로 툭 찬다. 깜짝 놀라는 언희. 휘연, 언희를 끌어당겨 손을 잡는다.

 

   매니저 : 언희 씨, 내일부터···.

   언희 : 나오지 마요?

   매니저 : 응? 아니, 출근해야지. 내일부터 스마일 배지 두 개 달고 일해.

   언희 : (당황하며) 네?

   휘연 : 미쳤군.

   매니저 : 못 들었어? 두 개 달고 일하라고. 그리고 동료들한테도 전달해. 내일부터 무조건 두 개 씩이야 두 개 씩! 두 개 정도는 있어야 배지의 효력이 제대로 발생할 것 같단 말이야.

   언희 : (어이없는 듯 웃는다) 달라지는 게 있나요? 도대체 그 효력이 뭔데요?

   매니저 : 그만큼 더 보기 좋게 실실 웃으라는 거야. 너희들 사적 감정? 손님들은 그딴 거 관심 없어. 일은 조금 못하더라도 언제나 웃어줄 수 있는 친구를 좋아하거든. 그저 배지처럼.

   휘연 : 손님들은 미소를 얻어가지만, 언희 씨를 비롯한 사람들은 정작 미소를 잃고 있어요!

   매니저 : 왜 미소를 잃지? 하루 종일 웃고 있는데? 얼마나 밝고 활기차. 물론 일하면서 화가 나거나 울고 싶은 순간이 들이닥칠 수는 있어. 사람이니까.

   언희 : (의아해한다) 네?

   휘연 : 그래 맞지. 사람인데!

   매니저 : (발로 통을 툭 찬다) 하지만 그런 시시콜콜한 눈물 콧물 다 막아주는 게 다 이 배지라니까?

   휘연 : 말이 전혀 안 통하는 군. 언희 씨, 그냥 나가요.

   매니저 : (큰 소리로) 나가긴 어딜 가? 뒷정리는 다 하고 나가야 될 거 아니야!

 

   매니저, 주변을 둘러보다 떨어진 배지를 줍고, 손으로 어루만진다.

   휘연은 계속해서 언희의 팔을 잡아당긴다.

 

   매니저 : 아이고, 이것 봐. 예쁜 배지 다 찌그러졌네! 일그러졌어!

   언희 : (울컥하며) 에이 씨! 그놈의 배지가 뭐라고!

 

   휘연의 손을 놓고, 통을 발로 걷어차는 언희. 안에 있던 스마일 배지들이 바닥에 흩어진다. 휘연과 매니저 놀란다.

 

   잠시 정적.

 

   언희 : (눈물이 터져 나오며) 도대체 이게 뭐가 중요한 건데! 이걸 하나 더 달고 있다고 해서 매출이 늘어나? 팝콘이 맛있게 튀겨져? 아무것도 아니면서 괜히 겉치레는!

   매니저 : 저 비싼 걸!

   언희 : 왜 뭐든지 막으려고만 해? 아파서 눈물이 터져 나오면 막을게 아니라 톡톡 위로해줘야지. 겉보기가 뭐가 중요해? 이미 속은 썩어 문드러지고 있는데!

   휘연 : 언희 씨···.

   언희 : 매니저님, 저 그만 둘게요. 이 지긋지긋한 놀이동산 같은 곳에서 더 이상 일 못하겠어요!

   매니저 : (흩어진 배지를 주워 담으며) 여기가 얼마나 일하기 좋은 곳인데 뭐가 불만이야? 내가 평소에 어려운거 시켜? 그냥 미소만 지어 달라고 하잖아?

   언희 : 웃음밖에 없는 광대들로 가득한 놀이동산! (배지를 발로 차며) 그것마저도 가짜웃음 뿐!

   매니저 : 미쳤군, 미쳤어! 저기 몇 개 더 굴러간다!

 

   매니저, 오리걸음으로 퇴장.

 

   언희 : (한숨 쉰다) 내가 미쳤어···. 난 이제 굶어 죽을 거야.

   휘연 : 목말라 죽는 것 보다는 나아요.

   언희 : 그게 그거지.

   휘연 : 다를 걸? 울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나.

   언희 : 말 이상하게 지어내지 말아요. 장난 칠 기분 아니니까.

   휘연 : 진심이야. 몸만 살아있으면 뭐해. 생기 하나 없는 얼굴인데.

   언희 : 갑자기 존댓말은··· 갑자기 내가 불쌍해 보여서 그래요?

   휘연 : (언희의 눈물을 닦아준다) 아니 전혀. 오히려 좋아. 더 이상 타인의 감정에 휘둘리지 말자.

   언희 : 그나저나 이름을 못 물어봤네. 아저씨 이름.

   휘연 : 아, 내 이름은 임휘연이야. (정색) 그리고 아저씨 아니거든?

   언희 : 휘연 오빠···. 언희··· 휘연···. 언휘연?

   휘연 : 어니언?

   언희 : (피식 웃는다) 억지는. 그 양파 얘기 좀 그만해요. 이제 말만 들어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려 그래.

   휘연 : 스스로 솔직해지는 법을 배우는 거지.

 

   언희가 휘연의 손을 잡는다.

 

   언희 : 그나저나 오빠, 나 궁금한 거 있어. 아까 영화 끝나고 오빠 울고 있었을 때, 왜 생판 모르던 나한테 그런 속마음을 얘기했던 거야?

   휘연 : (곰곰이 생각하다가) 처음에는 아무나 붙잡고 내 얘기를 들려주고 싶었고, 네 얘기 듣다 보니까 뭔가 쌓인 게 많아 보였어. 한 겹 두 겹 벗겨내면서 알맹이를 바깥으로 꺼내고 싶었어. 눈물 쏙 빼면서.

   언희 : 흠··· 아까 오빠가 최근에 목 놓아 울어본 적 없냐고 물어봤었지?

   휘연 : (언희를 꼭 안아준다) 그랬었지.

   언희 : 그게 꼭 오늘이 될 것만 같네.

   휘연 : 오늘은 크리스마스네.

   언희 : 메리크리스마스 오빠.

   휘연 : ··· 진부한 결말 같지만, 우리 만나볼래?

   언희 : 싫어 너무 뻔해! 오빠 아직 내 감정을 한 겹 밖에 안 벗겨봤잖아.

   휘연 : 그럼 거절?

   언희 : 몰라. 크리스마스 같이 보내다보면 뭐 하나 더 나오겠지.

   휘연 : 같이? 나랑?

   언희 : 몰라 여기서 빨리 나가요. 나 펑펑 울 거야. 이제 산타할아버지도 안 오시겠다!

   휘연 : 그럼 받았던 선물들 다 반납해야지. 울지 않기로 약속하고 받은 건데.

   언희 : 그냥 아무 말 마요. 돈 벌 곳도 잃은 사람에게 정말 못됐어.

   휘연 : (웃는다) 이리 가까이 더 와. 꼭 안아줄게.

   언희 : 그렇다고 너무 꼭 안지는 마. 옥죄지 말라고. 눈물 안 나와.

 

   휘연, 더 세게 언희를 안는다. 가방에서 양파 몇 개가 굴러 떨어진다.

   암전.

 

   막

 

희곡 부문 당선 소감

눈이 아닌 몸으로 써 나가는 대사 한 줄
 휴대전화 속 메모장에는 일백오십 개의 발상과 소재들이 쌓여 있습니다. 그중 절반 이상은 어떤 의도로 썼는지조차 잊어버려 의미 없는 낙서가 된 것들입니다. 무엇이든지 미루려고 하는 태도와 나태함이 아이디어를 지껄임으로 만들어 버린 셈입니다. 사실 실패를 두려워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안정적인 방향으로만 걸어가고자 낯선 것들은 모두 배제시켰습니다. 스스로를 옥죄는 행위였습니다.
 문예창작학과에서 문학을 공부한지 1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글에서 경험이 부족한 티가 난다는 지적을 받아 온지도 1년이 조금 넘은 것 같습니다. 새로운 경험에 갈증을 느끼고 있던 찰나였습니다. 당선이든 낙방이든 대사 한 줄 적을 재료가 필요했습니다.
 문학상 당선이라는 첫 경험을 선사해준 심사위원분들께 감사합니다. 갖고 있는 소재들을 감추지 말고 부지런히 꺼내 쓰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이겠습니다. 틀을 깨려는 시도를 두려워하지 말라며, 채찍질해준 김용상 교수님 감사합니다. 여전히 어렵지만, 움직이겠습니다.
 그리고 눈이 아닌 몸으로 누비겠습니다. 밋밋한 문체에서 가능성을 발견해주신 문예창작학과와 융합교양대학 교수님 모두 감사합니다. 흐릿했던 인간관계의 농도를 짙게 해준 문우, 조현범 형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그 외 저에게 흔적 또는 얼룩을 묻혀준 사람들에게 감사를 전하고자, 그들의 이야기를 또 다른 작품 속 대사로 담겠습니다.

 

희곡 부문 심사평

사건의 묘사 진부하나, 구성의 틀 갖춰
 예년에 비해 응모 작품이 적다. 세계적으로 K-영화, K-드라마가 관심을 받는 상황에서 보면 아쉬운 대목이다. 응모 작품들은 모두 사회 하부계층이 겪는 어려운 현실을 다룬다. 「톱니바퀴」, 「어니언 꺼풀」, 「가자, 에베레스트」는 젊은이들이 직업과 거주와 관련하여 겪는 어려운 현실을, 「재앙가족」과 「고사리 손」은 우울증과 치매, 친족 살해와 같은 문제를 다룬다. 청년 세대 응모자들이 이러한 현실에 얼마나 억눌려 있으며, 그 극복을 위한 고민이 얼마나 깊은지 응모작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난다.
 「톱니바퀴」는 젊은 노동자가 겪는 직장 내의 부조리 또는 폭력의 구조를 분명히 제시한다. 인물의 성격이 명확하고 사건이 비교적 구체적인 연결 구조를 지니고 있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시간 구성으로 연극적 장치를 잘 활용하고 있고, 대사의 언어도 자연스럽다. 그러나 소설식으로 제시되는 무대지시문이 극형식에는 너무 과도하다. 또한 공모전에서 제시한 단막극 분량을 많이 초과한다는 점도 지적사항이다.
 「어니언 꺼풀」은 영화관에서 알바를 하는 인물을 중심으로 감정적으로 늘 억압당하는 우리의 현실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스마일 배지를 억압의 도구로, 양파를 자유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여 연극적 상징을 잘 드러낸다. 가벼운 말장난 같은 언어 구사도 재치가 있어 극적 재미도 갖추고 있다. 일상의 어두운 면에 대칭되는 희망을 할머니와 꽃으로 배치하여 극의 전체적인 균형을 위한 노력도 돋보인다. 
 「가자, 에베레스트」는 직업과 거주의 문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젊은이들의 현재를 주제로 삼아 그 극복의지와 희망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러나 좀 더 분명한 극적 사건 없이 평면적으로 구성한 점이 아쉽다.
 「재앙가족」은 우울증을 다루고 있으나 그 구체적인 메시지가 없고 주제가 애매하며, 「고사리 손」은 다루는 살인사건이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작품을 평가하기 어렵다.
 심사위원들은 「어니언 꺼풀」을 당선작으로 선정하기로 했다. 사건의 묘사가 진부하다는 문제가 있지만 다른 응모작에 비해 상대적으로 구성의 틀을 갖추고 있고 주제와 메시지의 구체성, 희곡 언어의 구사 능력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김용 문학상의 핵심은 대학생들의 문학적 도전이다. 내년에는 좀 더 많은 도전을 기대한다. 

심사위원: 정민영(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 교수, 연극연출가)
이상복(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명예교수, 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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