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오래 전 일 같다. 숭산의 평전을 집필하기로 계획하고 돌입할 때 였다. 집필을 시작한 무렵, 교화현장의 교무님 한 분이 물어보셨다. "숭산님을 생전에 한번도 뵙지 못했는데 가능한 일일까요?" 

 물론 숭산은 본교에 있어서 지대한 발자취를 남긴 위인이시지만 필자는 그분의 먼 미래의 후손이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교무님의 눈에는 무모하게 덤비는 필자가 그저 안쓰러워 보였던 것 같다. 

 실제로 교무님의 우려처럼 필자는 숭산을 생전에 뵌 적이 없다. 심지어 그럴 개연성이 있는 조건과 환경조차 전혀 아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느 날 숭산 평전을 결심하고 집필에 들어갔던 것이다. 스스로 돌이켜봐도 의문이긴 하다. 과연 무슨 인연에서였을까?

 외관으로 일견하면, 숭산은 필자가 감당하기에 벅찬 인물이다. 원불교 교조 소태산 대종사의 큰 아들이었던 숭산 박길진(법명 광전, 1915-1986)은 두 말이 필요 없는 원불교 교학(敎學)의 최고봉인 동시에 교단의 큰 지도자였다. 

 또 1946년 유일학림 출범 이래 초급대학, 단과대학을 거쳐 종합대학에 이르기까지 학장, 총장을 맡아 오늘의 원광대학교를 있게 한 '원광의 큰 스승'이었다. 종교, 철학, 교육 세 분야에서 활동한 분이기에 그 중 어느 한 범주도 역사가인 필자에게는 적임일 리 없다.

 필자는 독립운동사 연구에 40년을 매달린 역사학도이다. 그 절대가치와 효용성을 깊이 인식하고 오직 이 한 길만 걸어왔다. 밤낮 생각하고, 쓰고, 듣고, 말해온 것이 항일, 독립, 광복이었던 만큼 이는 실로 오래도록 나와 일체화되어 함께한 동반자이다.

 오랜 연륜이 쌓인 역사가는 사료를 보면 이를 꿰뚫는 통찰력이 본능적으로 발동한다. 어느날, 사료를 통해 숭산의 역사적 자산가치를 사가(史家)의 감각으로 확신했다. 숭산을 관통하는 키워드, 곧 영성과 실천이란 두 단어가 그 상(像)을 지어 필자의 머릿속에 또렷이 나타나면서 '역사적 인물'로 숭산이 부상하는 순간, 그 가치를 발굴하고픈 욕망이 불같이 일어났다. 이에 선언적으로 평전 집필을 공언하고 오늘에 이른 것이다. 

 지난 2021년 봄, 필자는 숭산의 참된 가치에 착목한 박맹수 전 총장으로부터 숭산 연구를 권유받고 소고(小考)「자료를 통해 본 숭산 박길진」을 발표했다. 숭산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백세 노모의 환후와 임종이 이어지는 가운데서도 숭산 자료에 줄곧 묻혀 지냈다. 숭산을 잘 아는 어느 노교수가 그 집필의 어려움을 두고 '나 같으면 결코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 단언이 늘 귓전을 울렸다.  

 그토록 고단했던 날들, 하루 일과를 끝낸 뒤에는 언제나 '대견하다'고 흐뭇한 미소로 그날을 격려해주시는'마음 속 숭산'이 계셨기에 마침내 무탈히 탈고에 이를 수 있었다. 서거 38주기를 맞하는 금년 기일(忌日, 12.3)에는 곧 출간될 평전「원광의 빛 숭산 박길진」을 영전에 올려 그동안 무언의 격려에 보답코자 한다.

 단언컨대, 숭산은 원불교와 원광대학교의 소중한 역사자산이다. 생전에 남긴 많은 저술은 하나같이 허명(虛名)과 공론(空論)이 아닌 실천적 교학을 온몸으로 체인(體認)한 참된 위인이었다는 사실을 웅변해준다. 뛰어난 학문적 역량과 실천적 도량을 겸비한 참된 종교인이요, 구도자의 경건함으로 일생을 참되게 살다 간 '원광의 빛'이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숭산의 고귀한 가치가 잊히고 묻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아무리 고귀한 유산이라도 시기가 지나면 유물로 변해 자연에 반환되는게 진리라지만 그럼에도 씁쓸한 건 매한가지다. 특히 역사가인 필자에게 있어서 그 체감은 한층 더 강렬한 것 같다. 

 그럼에도 그 참된 가치를 제한된 과거가 아닌 영원한 오늘에 온전히 되살리고자 원불교와 원광대학교 발전에 이바지할 그날을 고대한다. 오늘도 마지막까지 숭산을 향한 소임에 스스로를 책려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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