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카보 뒤 샤 누아르 Caveau du Chat noir’라 불렸던 카바레 ‘샤 누아르 Le Chat noir(검은 고양이)’는 차츰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면서 유래 없는 성공을 거두었다. 매일 저녁 시인, 음악가, 샹송가수, 화가들이 그곳에 모여 각자 자기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고, 많은 가수들이 샹송을 불렀다. 그들은 카바레를 자신의 시를 낭송하고, 노래를 부르고, 자기가 그린 그림을 전시하는 예술적 실험실로 이용하였다. 샹소니에들은 아무런 구속이나 검열 없이 자신이 작사, 작곡한 노래를 불렀고, 화가들은 그러한 모습을 삽화로 그렸다. 이때의 카바레는 지금 우리나라의 카바레와는 다른 ‘예술적 카바레’였다.


‘샤 누아르’와 함께 빠뜨릴 수 없는 카바레 중의 하나가 카바레 ‘라펭 아질 le Lapin agile(민첩한 토끼)’이다. 몽마르트르 언덕 뒤에 위치한 이 카바레는 프레데 Frédé라는 샹소니에에 의해 예술적인 활기를 띄게 되었다. 기타와 첼로를 연주하는 프레데와 더불어 ‘라펭 아질’ 카바레의 화려한 역사가 태어났다.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작가, 시인, 음악가, 배우, 화가, 조각가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이 모여 서로 비평하고, 서로 도우면서 작품 활동을 하는 공간으로 이 카바레를 활용하였다. 피카소, 유트릴로, 브라크, 모딜리아니, 아폴리네르 등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예술가들이 이 카바레에서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고, 샹송을 듣고 따라 부르곤 하였다. 그곳에 모인 다양한 사람들의 공통분모는 동지애 속의 유머 감각이었다고 한다.


카바레 ‘샤 누아르’와 ‘라펭 아질’ 등이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벨 에포크’ 시대의 프랑스는 경제적으로 호황을 누리던 시기여서 서민문화도 활발하게 꽃을 피울 수 있었다. 카페 콩세르와 카바레는 많은 샹송 가수들이 자신이 직접 작사, 작곡한 아름다운 샹송들을 발표하는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그러나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에 의해 ‘벨 에포크’에 종지부가 찍히고, 샹송의 주도권은 카바레나 카페 콩세르에서 '뮤직홀 music hall'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 카바레들은 샹송을 들을 수 있는 공간으로 지금도 남아있다.)

 
뮤직홀은 카페 콩세르나 카바레보다 규모가 훨씬 컸고, 샹송 외에 서커스, 춤, 광대극 등 다양한 쇼를 보여주었다. ‘뮤직홀’이라는 영어 표현에서 짐작하듯이, 19세기 중반 런던의 윈체스터 홀에서 노래를 포함한 여러 가지 공연물이 흥행에 성공하면서부터 뮤직홀이라는 명칭이 프랑스에도 등장하게 되었다. 1893년 조제프 올레 Joseph Oller가 설립한 ‘올렝피아 Olympia’를 뮤직홀이라 부른 것이 그 시초였다. 오늘날까지 명맥을 이어오는 ‘올렝피아’에서 에디프 피아프, 아즈나부르, 미레이유 마티외, 아다모, 이브 몽탕, 쟈크 브렐, 달리다, 실비 바르탕 등 샹송에 대한 약간의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잘 아는 가수들이 노래를 불렀다. (몇 번의 증, 개축을 통해 뮤직홀의 대명사가 된 ‘올렝피아’는 1993년 파리 역사 유적으로 지정되었다.)


초기의 뮤직홀에서는 샹송은 그다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다. 뮤직홀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캉캉춤을 추는 무용수를 등장시켰고, 동물 서커스 등 큰 규모의 쇼를 도입하였다. 차츰 두 가지 무대 구성 방법이 정리되면서 샹송이 공연물의 중심이 되었다. 하나의 방법은 우리의 쇼 무대처럼 가수나 연예인이 차례로 등장하여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방식으로, 이때는 주로 가수들이 샹송을 불렀다. 또 하나의 방법은 뮤직홀 특유의 대규모 스타일인 ‘레뷰 revue' 형식으로서, 화려한 무대에서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방식이다. 다양한 무대장치와 적절한 조명에 현란한 의상을 걸친 무용수들이 노래와 춤을 겻들인 장면이 차례차례 펼쳐졌다. 이와 같은 레뷰는 제 1차 세계 대전 후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물랭 루쥬 Moulin rouge‘ 등의 뮤직홀에서 대규모 레뷰가 잇따라 공연되면서 샹송 가수도 새롭게 변하게 되었다. 즉, 노래를 잘 하면서 춤도 잘 추는 탤런트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조건에 잘 어울리는 레뷰의 대스타가 ‘미스텡게트 Mistinguett’와 그 파트너였던 ‘모리스 슈발리에 Maurice Chevalier’였다. 이들 외에도 많은 샹송 가수들이 뮤직홀 무대에서 데뷔하여 좋은 샹송들을 불렀다.

조용철(유럽문화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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