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캐나다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한국 유학생들이 그들의 강의실 환경에 대해 언급하던 것 중의 하나는, 수업 시간에 자신들의 "critical thinking"(비판적 사고)이 북아메리카 학생들에 비해 많이 부족하다고 느낀다는 것이었다. Critical thinking이라는 말은 교육학에서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이고 있으나, 이 학생들이 말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말한 것을 받아서 자신의 이야기와 의견을 곁들여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능력을 의미했다. 같은 수업을 듣고 앉아 있는 한국 학생의 눈에는, 말을 잘하는 현지 학생들이 한 가지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넘나드는 게 심하고, 쓸데없이 아는 척 하는 것 같고, 좋게 말하면 상상력이 풍부한 것이지만, 앞서 말하고 있던 내용과 무관해 보이는 이야기를 갑자기 끌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업 참여가 학기말 점수의 일부로 포함이 될 때는 이러한 적극적인 참여의 필요성이 절박해지는 것이었다. 온라인 게시판을 활용해서 수업 토론에 참여하고 있던 한 한국 학생은 내게 이렇게 이야기 한 적이 있다. "캐나다 학생들은 아주 단순한 주제에 대해서도 다양한 측면으로 얘기를 잘 하는 것 같아요. 게시판에 토론 주제가 주워지면 거기에 대해 난 별로 할 말이 없는데, 여기 친구들은 토론 주제와 직접 관련이 없어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도 얘기를 하더라고요. 나도 그 사람들의 글에 뭔가 댓글을 남겨야 하는데 쉽지가 않아요. 다른 학생들이 올린 글에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그래, 당신 말이 맞소,' 그 말 뿐이고 더 이상은 할 말이 없어요." 그렇게 말한 그는 그렇다고 해서 성적이 떨어지는 학생은 아니었다. 한국에서 국비 장학금을 받고 유학을 온 상태였고, 평소 이야기를 나누면 다양한 주제에 관해 상당히 "critical"하며, 많은 지식을 갖고 있다고 느끼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왜 그는 자신이 critical thinking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이었을까?
우리의 대학 강의실로 넘어가 보자. 학생들은 개강을 하고 첫 수업에 들어 올 때 무슨 생각을 하며 들어오는가? 의자에 등을 기대고 편히 앉아서 교수가 전달해주는 지식을 조용히 경청하고, 자신의 머릿속에 담아서, 학기말 시험에서 그 동안 외운 것들을 다 토해내고, 개운한 마음으로 강의실을 훌훌 털고 나갈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을 갖고 있지는 않은가? 교수가 정답도 없어 보이는 질문들을 자꾸 던지면서 이 사람 저 사람 말해보라고 하면, 속으로, '나 시키면 어떡하지? 그냥 지금 답 가르쳐 주면 얼마나 편해!'하고 바라며 긴장하고 앉아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가 이렇게 토론하는 것에 대해 소극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학자들은 문화적/교육적 배경으로 이를 설명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Stefani라는 학자는, Argumentation (논쟁)과 debate (토론)을 높이 평가하는 북미 문화와 달리 조화와 협력을 더 강조하는 아시아 국가들의 학교에서는, 학생들 간의 토론 문화가 익숙하지 않고, 특히나 수업 중에 학생들이 의문을 제시하거나 의견을 피력하면 마치 교사(교수)의 학문적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기에, 이러한 그들의 모습이 북미의 수업 상황에서도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물론 영어 실력이 충분하지 않기에 거기서 오는 자신감의 결여도 부인할 수 없는 요인이긴 하겠으나, 위에서 지적한 문화적 교육적 요인도 무시할 수는 없어 보인다.
게다가 "동방예의지국"이라는 title을 지키다 보니,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소신 있게 자신의 반대 의견을 피력하는 것을 주저하고, 어린 아이들은 어른 앞에서 조용히 있어야하는 전통도 한 몫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어른들 얘기하는데 어디 예의 없이 끼어들어!" 이런 말을 주위에서 하는 것을 들어봤을 것이다. 미국에도 이런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린 아이 때부터 의견을 피력하려는 시도를 단지 "버릇없고 미숙한 것"으로 무시, 묵살하던 이런 태도가 비평적, 창의적 생각으로의 성장을 저해하고, 중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쳐, 심지어 대학원에 가서도 토론하는 것에 주눅 들게 하는 결과를 나은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한다.
전에 알고 지내던 미국 친구와 그의 딸 Alonda의 얘기를 하고 싶다. Alonda가 다섯 살이었을 때, 그녀는 자기 이름이 맘에 안 든다며, 그녀의 아버지에게 이름을 바꾸어달라고 졸랐다. 그녀가 제시한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에서 착안한 삐삐 스트로베리 (Pippi Strawberry)였다. 여느 아버지라면 이런 딸의 제안에 어떻게 대답했을까? "네가 제 정신이냐? 나중에 어른이 되서 무슨 후회를 하려고.... 아니, 5년 후에는 네 마음이 또 어떻게 바뀔 줄 알고, No!"운운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녀를 삐삐 스트로베리로 부르기 시작했고, 주의 사람들에게도 공지했다 (물론 그들은 법원까지 가는 수고는 하지 않았다). 그녀가 좀 더 성장하고 나면, 한 때 그녀가 최고의 이름이라고 여겼던 삐삐 스트로베리가 더 이상 맘에 안 들지도 모른다(확신컨대 그럴 것이다). 그리고 미성숙한 딸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그녀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것을 방관했던(오히려 적극적으로 도왔던) 자신의 아버지의 경솔함과 무책임함에 화를 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대신 한 가지 매우 소중한 것을 얻었다는 것도 깨달게 될 것이다. 비록 다섯 살의 소녀에게서 나온 의견일지언정 그것을 아버지가 존중하고 받아들여 주었다는 사실. 아버지의 신뢰를 받아 그렇게 키워진 그의 딸은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일에 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며, 그로인해 더욱 더 발전된 사고, 창의적인 사고를 practice(연습)하며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지식의 전달과 수동적 (passive) 습득 (reception/acquisition)으로 대표되던 시대를 지나 "learning-as-participation"(참여로서의 교육)의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 날의 학생들에게 바라는 것은, 그들 자신이 learning의 주인이 되어 책임 의식을 가졌으면 하는 것이다. 좀 더 적극적으로 수강 계획을 세우고, 그 수업에서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들을 점검하고, 틀린(?) 답을 말하는 것에 대해 조금 더 담담해지고, 의문점들은 언제든 교수에게 당당하게 질문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암기하는 수업이 아닌, 높은 단계의 사고를 연습하는 수업 안에서, 획일된 사고에 묶이지 말고, 자유로운 사고와 독립된 사고가 주눅 들지 않는 교육 환경을 누리며, 즐겁게 교육을 공유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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