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군의 실종을 우리 멋대로 보고합니다
김하늘(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 3년)
 

A군, Z양, 존슨 F, 체리 P, 기관장, 선생

 

1.오후 수업 - 교실

   (무대가 밝아진다)

   학교에서 쓰는 책상과 의자 네 쌍을 무대 와 마주하게 놓는다. 관객석에 가장 가까운 곳에 Z양의 자리를 놓는다.A군의 자리는 구 석진 곳에 있고, 그 반대편 구석에 체리의 자 리를 놓는다. 죤슨의 자리는 A군의 자리 바 로 옆 자리다. 그들은 모두 교복을 입고 있 다. A군은 톱을 가지고 책상을 파는 중이고, 체리(백합 장식이 달린 머리띠와 백합 무늬 카디건을 입고 있다)는 A군을 흘끔거리면서 무언가를 쓴다. 죤슨(두툼한 겨울 점퍼를 교 복 위에 입고 있다)은 그런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면서 양 손에 쥔 향수병을 흔든다, 이어서 Z양의 자리에 조명을 집중한다.

   Z양(목소리만) : 언제쯤 어른이 되냐고 묻 던 시절이 있었다. 몇 밤을 자면 엄마처럼 키 가 크냐고 종일 물어댔다. 어른이 되면 뭐든 자유롭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실수로 커피를 쏟아서 이스라엘로 이민을 가거나, 불친절한 택시 기사에게 사귀어 달라며 고백 하거나, 곰돌이가 그려진 잠옷을 입고 성인 용품점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하지 만 지금 내 잠옷은 학교 체육복이다. 얼른 엄 마만큼 크겠다고, 엄마처럼 예뻐지겠다고 말 하던 꼬맹이는 오래 전에 없어졌다. 대신 절 대 엄마처럼은 살지 않겠다고 말하는 버릇이 생겼다. 오늘도 토스트에 잼을 너무 많이 발 라놓아서 그런 말을 했다.

   순간 A군의 톱이 떨어진다. 조명 전체를 고루 밝게 한다.

  죤슨(A군의 떨어진 톱을 줍고): 떨어뜨리 지 좀 마.시끄럽잖아.
   A(머리를 적이며): 미안해, 죤슨, F. 무슨 그림 그려? (죤슨의 책상을 본다.) 멋진 증기기관차네. 좋겠다, 그림 잘 그려서. 난 잘 안 되네.
  죤슨: 왜 책상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모르겠지만, 곧 선생이 올 거야.집어넣어.
   A군: 응, 응.보물은 숨겨놔야 보물이니까.
  죤슨: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머리를 는다.) 모르겠다.알아서 해.

   A군이 자신의 커다란 백팩을 열고 톱날을 집어넣는다. 이어서 책상을 쓰다듬고, 후 바 람을 분다. 무대 끝에서 선생이 출석부를 들 고 걸어온다. A군은 자세를 바로 잡는다. 선 생은 관객석을 등지고 무대 중앙에 서서, 출 석부를 펼치고 헛기침을 한다.

   A군(가방을 매고 일어나면서): 선생님! 선생: 응?무슨 일이냐.

   반 아이들의 시선이 A군에게 쏠린다.

   A군: 아뇨, 딱히 일은 없습니다. 다름이 아 니라 오늘부터 학교를 그만둘까 해서요. 집 에도 말은 해놨습니다. 아마 저녁 즈음에 엄 마가 A군이 가출을 했다면서 연락을 할 거예 요. 원래는 아무 말 없이 관두려고 했지만, 그건 예의가 아닌 거 같아서요.

  선생: 뭐?

   A군: 그럼 지금까지 감사했습니다.(경례)

   A군이 교실 바깥으로 나가려는 걸 죤슨이 붙잡는다.

  죤슨: 너 지금 뭐하려는 거야?

  선생, A군 쪽으로 걸어온다.A군은 죤슨의 팔을 부드럽게 치운다.

   A군: 신세 많았어, 죤슨, F.

  죤슨(가만히 멈춰 있다가 허둥지둥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낸다. 지갑에 든 돈 을 전부 꺼내 A군에게 쥐어준다.): 얼른 가, 멍청아.

   A군은 잠깐 주춤하다가 교실 밖으로 뛰어 나간다.선생이 뒤를 쫓는다.

   (무대 암전)

   Z양(목소리만): 한동안 우리들을 귀찮게 했던 A군의 실종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2.야간자율학습시간 - 교실

   (무대가 밝아진다)

   교실에 A군은 없다.

   선생: 잠깐 내려갔다 올 테니까 모두 공부 하고 있어!

   선생, 무대 바깥으로 나간다.

   Z양(문제집을 넘기면서, 목소리만): 선생 은 대학에 가면 모든 것이 해결 될 것이라 말 했다. 그는 꽤 좋은 대학을 나온 걸로 들었 다.학기 초까지만 해도 나는 그가 좋은 대학 을 나와 행복하게 사는 줄로 알았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아내가 매일 도시락을 싸준다 고, 자랑처럼 말하기도 했다.하지만 왜 오늘 그의 와이셔츠엔 라면 국물 튄 자국이 있을 까. 왜 일주일 전에도 같은 와이셔츠에 같은 자국이 있었을까. 어쨌든 A군이 학교 바깥으 로 나간 뒤로 네 시간하고 사십육 분이 지났 다. 내가 왜 이 시간을 알고 있어야만 하는 걸까?

   체리, 선생이 나간 걸 확인하고 Z양의 자리 로 온다.

  체리: Z양, 어쩌면 좋지? A군이 학교를 나 간 뒤로 네 시간하고 사십칠 분이 지났어. 벌 써 사십칠 분이 지났다고. 이걸 어쩌면 좋을 까? A군은 분명 마피아한테 협박을 받은 거 야. A군은 지금 원양어선에 타고 있어. 만약 A군이 타지 않았으면 우리 반 전체가 팔려갔 을 거야.
   Z양(한숨을 쉰다.): 체리, 어제 야자 시간 에 선생 몰래 무슨 화 봤니?
  체리: 그건 왜?마피아들의 암투를 그린 화는데?
   Z양: 그냥 물어봤어. 나는 두 가지 가설을 세우고 있는데, 일단 체리, P. 너는 내 방 침 대에 있는 진드기보다 머리가 나쁜 년이고, 멍청한 네가 짝사랑하는 A군은 그냥 학업 스 트레스 때문에 가출한 걸 거야. 그 녀석 친구 도 별로 없었잖아. 원래 고3은 자기들이 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줄 알지.
  체리: 웃기는 소리하지 마, Z양. 분명 내가 A군에게 텔레파시로 (양 손으로 머리를 짚고 눈을 감는다.) A군, 혹시 지금 우릴 지키기 위해 원양어선에 팔려가는 거니?(양 손을 뗀 다.) 라고 물었는데 내게 답하려고 고개를 과 장되게 숙단 말이야.
   Z양: 병신아, 그건 꼴에 폼 잡으면서 선생 한테 인사를 했던 거잖아!

  체리: Z양은 아무 것도 몰라! 원양어선에 팔려 가야했던 건 너어야 했어. 일곱 살 때같이 두꺼비집을 만들 때부터 느꼈지. Z양은 원양어선에 팔려가도 시원찮을 아이다는 걸!

   Z양: 두꺼비집 실수로 무너뜨렸다고 십 년 넘게 우려먹지 마! (한숨을 쉰다.) 알았어, 같 이 A군을 찾아보자.
  체리(기쁜 표정으로 Z양을 껴안는다.): Z 양 같은 머리 좋은 애가 아군이면 충분해!
   Z양: 찐득거려, 달팽이 같은 년아! (체리를 떼어놓고 교실을 둘러보다가, 죤슨과 눈이 마주친다.) 죤슨, 잠깐 얘기 좀 할까?(체리의 팔을 잡아끌고 죤슨의 자리로 간다.)
  죤슨(쭈뼛거리면서 향수를 뿌린다.): 무슨, 뭐?아니, 무슨 일이야?
   Z양: 멍청하게 굳어 있지 마. 체리(A군의 자리에 앉아 다리를 꼬고): 굳 어 있지 마으아 (말을 끝내기 전에 재채기를 한다.) 으아아, 죤슨. 너 향수 좀 그만 뿌려. 냄새 진짜 나빠.
  죤슨(발끈한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Z양: A군에 대한 정보가 필요해. 너 A군이 교실 나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붙잡았잖아. 옆 자리에 앉은 사이기도 했고. 뭔가 아는 거 없어?있으면 듣고 싶어.
  죤슨: 별로 아는 건 없지만. (Z양과 체리의 얼굴을 번갈아 본다. ) A군 그 녀석 친구도 없 이 매일 혼자 있었잖아. 그래서 조금 잘 대해 주려고 했어.근데 뭐라고 해야 하지?톱날이 나 커터 칼 같은 걸로 종일 책상을 파고 있는 거야.그래서 나는 그냥.
  체리: 그건 네가 A군에 대해 아무 것도 모 르기 때문이야! 멍청한 오리털 잠바, 멍청한 향수 중독자, 원양어선에 팔려가야 했던 사 람은 Z양이 아니라 바로 너어!
   Z양(체리의 입을 막는다): 내가 보기에 그 건 너 같으니까 그만 좀 닥쳐. 어쨌든 죤슨, 너 A군이 교실에서 나가기 전에 붙잡았잖아. 왜 그런 거야?
죤슨(망설인다): 그건.
  체리: 그건?
  죤슨: 나는 그때 A군에게 지갑에서 돈을 꺼내서 건네줬어.
   Z양: 왜 그런 건데?
  죤슨: 나도 잘 모르겠어.

   일동 한동안 침묵.

  체리: 너, 바보? 죤슨: 바보는 너잖아. 체리: 내가 왜 바보야!

   Z양: 둘 다 조용히 해 봐. 일단을 알겠어. 나중에 무슨 일 생기면 그땐 꼭 말해야 돼. 난 아무 상관없지만 (체리를 흘끗 본다.) 어 쨌든 꼭 알려줘.
  죤슨: 말할 것도 없다니까. Z양: 알았어, 알았어. 그리고 너 그림 그만 그리고 공부 좀 해. 미대 지망이라고 해서 그 림만 그리면 아무 것도 못해. 오늘은 또 뭐 그렸냐.
  체리(죤슨의 책상에 있는 연습장을 뺏어 든다.): 와아, 오늘은 증기기관차잖아!

  죤슨(연습장을 빼앗는다.): 너희 알 바 아 니잖아!
  체리: 왜 그래, 이건 칭찬인데.
  죤슨(부끄러운 표정으로 연습장을 책상 속 에 넣는다.): 시끄러워.
   Z양: 가자, 체리.(교실 바깥으로 나간다.)
  체리: 아, 응. (Z양을 뒤따르다가 죤슨을 돌아본다.) 죤슨! 그림은 잘 그렸어, 그림은!

   죤슨, 향수를 몸에 뿌려댄다.

   (무대 암전.)

3.방과 후 - 밤거리

   (무대가 밝아진다)

   죤슨이 홀로 귀가하고 있다. 어두운 조명 이 무대를 비춘다. 점퍼를 동여매고 걷느라 작은 그의 몸은 굴러다니는 돌처럼 보인다. 그가 무대 중앙을 지날 즈음에 프로젝터를 이용해 열차가 오는 상을 재생한다. 죤슨 과 열차가 다가오는 상이 그대로 겹쳐진 다. 죤슨은 허둥지둥 관객석 쪽으로 뒷걸음 질 치다가, 넘어지고, 뒤로 물러나려 한다. 기차가 멈춘다.

  죤슨: 뭐야! 뭐, 뭐? (간신히 일어나서 관객 석을 돌아본 뒤, 머리를 는다.) 기차?

   관객석 쪽에서 기관장이 나타나 죤슨의 어 깨를 잡는다.죤슨은 놀라서 뒤를 돌아본다.

  기관장: 안녕하세요, 죤슨, F! 기차 맞습니 다. 오늘 당신이 그린 기차랑은 좀 다르겠지 만요. 증기기관차로는 저희들의 업무를 수행 하기 꽤 힘들어서요.

  죤슨: 네? 아니, 그러니까, 왜 기차가 거리 에 있는 거죠? 당신은 누구죠? 아니, 기차라 고요? 기차가 왜 거리에 있는 거죠? 당신은 누구죠? 그러니까 기차잖아요? 기차가 왜 거 리에 있는 거죠? 당신은 누구죠? 아! (손뼉을 친다.) 어떻게 제 이름을 알고 있죠? 아니 잠 깐만 내가 오늘 기차를 그린 건 어떻게 아는 건데요!
  기관장: 천천히 하나하나씩 물어보라고는 안 할게요. 입이 움직이는 건 기분 좋은 일이 니까요. 저는 이 기차의 기관장이에요. (양 팔을 펼친다.) 복장을 보면 아시겠죠?그리고 이건 기차에요. 어릴 적에 배웠죠? 기차라고 요.기, 차.따라해 봐요.기, 차.
  죤슨: 기차가 왜 도로 한복판에 돌아다니 는 건데요?
  기관장: 기차가 모두 철로 위에서 이동해 야한다는 건 편견이에요. 오늘 당신이 그린 기차도 철로 위가 아니라 종이 위에 있었잖 아요?제 기차는 철로도 종이도 아닌 도로 위 에 있는 거랍니다. 물론 도로를 이용해 이동 하는 건 아니에요. 원랜 구름을 뚫으면서 그 추진력으로 하늘을 날아야하는데, 오늘은 당 신을 데리러 오느라 잠깐 내려왔지요.
  죤슨: 저를 데리러 왔다고요?
  기관장: 그래요. 저희 기차는 몽실몽실한 구름의 살을 뚫으면서 살고 있죠. 그러면서 전 세계의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전달해 줘요.당신도 하나 드실래요?
  죤슨: 아이스크림은 좋아하지만, (망설인다.) 아이스크림을 핥는 것보단 주는 걸 좋아해요.
  기관장: 유감스럽게도 비슷한 성향을 지녔네 요.그래서 제가 당신을 데리러 온 거랍니다.
  죤슨: 아이스크림 때문에, 데리러 왔다고요?
  기관장: 저희 기차의 업무는 아이들이 능 숙하게 아이스크림을 핥도록 준비하는 겁니 다. 당신 같은 가치관을 지닌 사람이 필요해 요.물론 당신처럼 남들이 핥는 걸 보고 좋아 하는 사람은 많지만 당신은, 음, 흠, 그러니 까 일단 향수를 뿌릴 정도로 체취가 심하고, 음, 흠 쎄요, 기차를 그릴 정도로 좋아한다 는 점과, 또 이름이 죤슨인 덕분에 선택받았 다고 해야 하나요.
  죤슨: 당신 말,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엄청 야하게 들려요.
  기관장: 제 탓도 있지만 당신 탓도 있다고 생각하네요.죤슨, F씨.
  죤슨: 제 이름 지적하지 말아주실래요?
  기관장: 그렇지만 너무 노골적인 성적 은 유 아닙니까?놀리는 건 아니에요.당신 나이 대의 사람들은 다 그렇죠, 뭐.그래서 어쩌고 싶습니까? 저희랑 같이 가실래요? 저희와 함 께라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아이스크림을 입 에 넣고 후루룹, 흐르륵, 거리는 걸 볼 수 있 답니다!
  죤슨: 그렇게 갑자기 말하셔도 말이죠.

   순간 관객석 쪽에서 A군이 난입한다.

   A군: 가면 안 돼, 죤슨, F!
  죤슨(놀란다.): A군?
   A군(죤슨 쪽으로 다가오며 주머니에서 지 폐를 꺼낸다.): 이거 돌려주려고 왔어. 네가 준 돈 정말 고마워. 하지만 난 남에게 아무 대가 없이 받은 돈으로 살고 싶지 않아. 그러 고 싶지 않아서 학교를 그만 둔 거니까. 그러 니까 돌려줄게. (죤슨의 손에 지폐를 쥐어준 다.) 어쨌든 가면 안 돼, 죤슨.
  기관장: 음, 안녕하세요. 아이스크림 드실 래요?
   A군: 저는 아이스크림 싫어해요. 보는 것 도, 핥는 것도.
  기관장: 유감이군요.
  죤슨: A군! 지금 몇 사람이 널 걱정하는지 알고 나타난 거야?
   A군: 몰라, 학교를 나왔으니까. 너도 지금 학교 밖에 있잖아.그러니까 말리는 거야.
  죤슨: 아니, 나는 지금 기차에 탈 생각도, (망설인다.) 뭐랄까, 신기해 보이긴 하지만 너무 신기해서, 그렇다고 해도 말이지.
  A군: 죤슨, 너는 아이스크림을 핥는 걸 보 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잖아. 너는 그림을 그 리고 싶다 했잖아. 이 사람 말에 속지 마. 기 차가 눈에 들어와서 그린 것도 있지만, 너는 그림이 기차보다 좋아서 결국 그렸던 거잖아.

  기관장: 저기요, 죤슨. 슬슬 일을 하러 가 야해요. 빨리 결정하지 않으면 두고 가 버릴 거예요?제 말 잘 들어주세요.그림을 그리든 건강 음료를 시음하든 싸구려 노래방 아르바 이트를 하던 아이스크림을 모르는 사람은 없 어요. 아이스크림을 먹거나, 아이스크림을 주거나, 둘 중 하나의 삶을 사는 거라고요.

  죤슨: 아니, 당신들 말이야.나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니까. (난처한 표정으 로 점퍼 주머니에서 향수를 꺼내 뿌린다.)

   (무대 암전.)

  죤슨: 나도 향수를 뿌리는 건 싫어. 그렇지 만 내 냄새는 고약한 걸.

4. 오전 수업 - 교실

   (무대가 밝아진다)

   죤슨이 Z양의 자리 앞에 서있다. Z양은 문 제집을 넘기고 있다. 죤슨은 Z양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들리진 않는다. Z양 은 고개를 끄덕거린다. 죤슨이 양 팔을 벌려 기관장이 했던 동작을 흉내 내는 사이, 가방 을 맨 체리가 나타난다. 체리는 빠른 걸음으 로 Z양의 자리로 향한다.

  체리: 무슨 일이야? 뭐 알아낸 거 있어? 그 래서 원양어선은 지금 어디쯤에 있대? 죤슨: 내 이야기는 이걸로 끝이야. 믿든 말 든 마음대로 해.하지만 난 진심이었어.

   Z양: 그래, 다음 만화 기대할게. 죤슨: 진심이었다니까! Z양: 알았어, 알았어. (Z양은 체리와 죤슨 을 번갈아 본다.) 너희 둘이서 사이좋게 체리 원작 죤슨 그림 콤비로 만화를 그리면, (문제 집을 넘긴다.) 호루스가 파충류가 되고 제우 스가 애처가가 되고 로키의 취미가 나비 수 집이 되는, 뭐, 그런 환상적인 세계도 만들 수 있겠네. 죤슨,

  체리: 너 지금 그거 비꼬는 거지?

   Z양: 당연하지. 너희가 우주 최강이니까. 죤슨, 넌 이제 네 자리 가라.

   죤슨, 머리를 으며 자기 자리로 간다.

  체리: 죤슨이 무슨 말 했어?

   Z양: 어젯밤에 ET랑 A군이 손에 손을 잡 고 부부싸움을 하는 꿈을 꿨대. 체리: 역시 A군은 지구를 지키려던 거구 나!
   Z양(문제집을 덮는다.): 너도 그냥 입 다물 고 네 자리로 가라.
  체리(팔짱을 낀다.): 왜 그렇게 심술을 못 부려서 안달이니? 어리광 받아주는 것도 힘 들다니까. 내가 조금이라도 어른스러우니 참 아야지, 뭐.
   Z양: 내가 너보다 어른스럽다는 건 앞으로 내가 갈 대학, 언젠가 생길 부자 남편, 또한 언젠가 분양받을 혈통 있는 애완견이 증명해 줄 테니까 조용히 좀 해줄래?
  체리: 돈만 있다고 모두 행복한 건 아니야. 재벌이 자식 때문에 속 안 썩었을 줄 아니?Z 양은 공부도 잘하면서 왜 그걸 모를까. A군 같은 좋은 아이를 나만 알아봤다는 점이 모 든 걸 증명해주고 있어. 그보다 죤슨이 무슨 얘기 했는데?
   Z양: 정말 별 거 아닌 얘기어. 저놈은 믿 을 놈이 못 돼. 오늘은 야자 도망치고 A군의 집에 가보자. 아, 점심시간에 사물함이랑 책 상 속도 뒤져봐야 해. 체리: 오, 생각보다 열심이네? 역시 Z양도 A군이 얼마나 괜찮은 애인지 깨달았구나. 나 보단 늦지만 말이야. 늦었으니까 A군한테 반 하면 안 돼.알았지?

   Z양: 걱정하지 마. 차라리 골프나 치러 다 니는 우리 아빠한테 반할 테니까. 그냥 A군 이 너무 병신 같아서 한 대 때려주려고 그러 는 것뿐이야. 선생이 출석부를 들고 교실에 들어온다. 체리, 선생을 보고 자기 자리로 뛰어간다.

   (무대 암전)

5. 점심시간 - 교실

   Z양(목소리만): 초등학교 고학년 때 수련회 에 가서 부모에게 편지를 썼다. 그때 우리는 의례적으로 엄마, 아빠, 사랑해요, 따위의 말 을 써야만 했다. 지금 당장 거리로 나가면 같 은 사랑을 기껏 다른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 가 들릴 것이다. 다들 울면서 진심으로 편지 를 썼는데, 왜 부모에게 전하고 싶은 사랑의 원산지가 뮤직 뱅크 무대을까. 엄마는 어 릴 적 카페에서 연주를 하는 재즈 밴드의 노 래를 사랑했다. 그들은 지금 일용직 노동자 로 일하는 중이라 했다. 그래서 엄마는 지금 도 내 생일을 자주 까먹었다. 나는 더 가치 있고 깊은 것들을 전해야만 했다. 물론 사랑 을 줄 상대를 알아가는 것도 중요했다. 뮤직 뱅크 무대 위에서 립싱크를 하는 가수와 동 일하게 보면 큰일이니까. 신중하게, 왜곡되 지 않은 모습을 봐야 했다.

   (무대가 밝아진다)

   무대 위엔 여전히 책상이 네 쌍 놓여 있다. 죤슨은 자리에 없고, Z양과 체리가 A군의 책 상 곁에 선다. A군의 책상 위엔 편지 봉투가 수북하게 쌓여있다. 체리는 고개를 숙인 채 편지를 흘끗거리고, Z양을 편지를 하나 집어 서 보다가, 기분 나쁜 표정으로 바닥에 떨어 뜨린다.

   Z양: 이게 다 뭔지 설명해봐, 체리, P.
  체리(난처한 어조로): 뭐긴 뭐야, 러브 레 터잖아.
   Z양: 그러셔?러브 레터라는 걸 사물함 속에 가득 채워놓고, 책상 속에도 가득 채워 놓고 말이야.이런 꼴이 나온 화는 멜로가 아니라 주로 사이코 스릴러라는 거 알고는 있어?
  체리: A군은 남들과 달라. 멜로 화의 느 끼한 주인공들과 달라서 그래.
   Z양: A군은 무슨 아프리카의 토착 민족이 냐? 편지에 쓴 자부터가 한국어가 아니잖 아. 도대체 뭐야, 이 지이가 퍼레이드 하는 것 같은 자는.
  체리(기분 나쁘다는 어조로): 그건 A군과 나만 볼 수 있는 우리들만의 언어야! 왜 Z양 은 날 못 괴롭혀서 안달이야? A군을 좋아하 는 내 마음은 알지도 못하면서 안다는 듯이 떠들지 마. A군을 좋아한다고 확신한지 며칠 이 지났는지 알아? 내가 너보다 A군을 훨씬 잘 알 걸? 지금도 말이지. 사실 텔레파시만 보내면 말이야. (양 손을 머리에 짚는다.) A 군, A군, 지금 어디 있니? (양 손을 머리에서 뗀다.) 하고 물어보면 음성이 들린다고.
   Z양: 그럼 그걸로 A군을 찾아가면 되겠네.
  체리: 하지만 A군이 이렇게 말한단 말이 야. (A군의 목소리를 따라하며) 여긴 위험하 니까 체리, 몰라도 돼. 미안해. (다시 본래의 목소리로) 라고 한다고!

   Z양, 한숨을 쉰다.

  체리(울먹거린다.): Z양은 진짜 나빴어. 원 양어선에 팔려가야 했던 건 Z양이었어. 두꺼 비집도 부수고 말이야. 두꺼비가 올 수도 있 었는데.

   Z양(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어트린다.): 알았어, 알았어. 내가 미안해, 체리. 울지 마, 바보야.다음에 비오면 두꺼비집 만들러 가자. 네가 만들어야 해.난 흙 이제 싫으니까.응?

  체리(눈가를 닦으면서): 정말?

   Z양: 그럼. 야자 빠지고 A군의 집에도 가 야 하잖아? 체리(활짝 웃는다.): 응!

   (무대 암전)

   Z양(목소리만):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확신 이 들 때가 있다. 좋아하는 느낌만으로 상대 방에 대해 남들보다 더 많이 알게 되는 걸까? 중학생 시절, 좋아하던 오빠가 코를 파는 모 습을 본 적이 있다. 물론 사람은 모두 코를 파지만, 그걸 먹을 줄은 몰랐다. 그런데 왜 그 오빠랑 친하지 않은 오빠는 아 저 코딱지 파먹는 새끼? 하고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던 걸까.

6. A군의 집 앞 - 저녁

   (무대가 밝아진다)

 노을빛의 조명을 무대 안에 채운다. 자동차 그림이 그려진 판자와 집 그림이 그려진 판자를 무대 중앙에 세워둔다. 자동차는 실물 사이즈로, 집 그림은 거리가 떨어져 있으므로 작게 해도 무방하다. 자동차 판자를 관객석 쪽에 가깝게 세워두고, 집 판자는 무대 깊숙한 곳에 세워둔다. 두 판자 주위엔 편지 봉투가 흩뿌려져 있다. Z양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자동차를 만진다. 체리는 안절부절 못하며 Z양의 눈치를 보고 있다.

 Z양(체리를 돌아보며): 체리, P. 일단 사과할게.

   체리: 응?

   Z양: 너랑 어릴 적부터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던 친구로서, 네가 이런 정신 나간 짓거리를 하고 다닌 줄 몰랐던 것에 대한 사과야. A군이 어떻게 되먹은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였으면 널 이미 고소했을 거야.

  체리: 잠깐만, Z양. 나는.

  Z양(편지봉투를 체리의 얼굴에 들이민다.): 도대체 이게 다 뭐야, 체리, P. 저 집을 봐. (편지봉투를 든 손으로 집이 그려진 판자를 가리킨다.) 저기에서 사람이 살고 있을 것 같아? 이 자동차는 또 뭐야.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A군이 우리랑 다르다고? 아, 그럼 네가 좋아하는 A군은 스토커한테 두근거리는 변태였구나. 완전 미쳤어, 이런 짓을 하는 너나 이런 꼴을 보고도 널 가만 놔둔 A군이나.

  체리: 말이 너무 심하잖아, Z양!

  Z양: 내 말이 심한 게 아니라 네가 해놓은 꼴이 너무 심했어! 텔레파시라니, 우리들만의 언어라니, 웃기지 마. 넌 진짜 순수해빠진 년이니까 그러려니 했어. 그래서 널 도와준 것뿐이야. (편지 봉투를 짓밟는다.) 나는 돈 있는 남자랑 결혼해서 애 유학이나 보내고 살면 다지만, 너는 아직도 무슨 연애 소설 같은 삶을 바라니까. 그리고 난 널 꽤, (한숨을 쉰다.) 꽤 좋아하니까. 근데 이건 아니야. 이것마저 네 편을 들어줄 순 없어. 넌 잘못됐어, 체리. 넌 A군을 좋아하는 것도 아닌 거 같아. 네 멋대로 A군을 네 이상적인 남성으로 만든 것뿐이라고. 

  체리: 아냐! 나는.

  Z양(체리의 말을 가로막고): 너 A군한테 말 걸어 본 적도 없잖아, 지금까지!

  체리: 으, 으, (울먹인다.) 이 두꺼비집 킬러야! (Z양을 밀치고 무대를 빠져나간다.)

 Z양, 자세를 추스르고 밟았던 편지봉투를 집어 든다. 한숨을 쉰다. 편지봉투에서 내용물을 꺼내 펼쳐본다. 

 Z양(당황한 어조로): 욕을 해도 두꺼비집 킬러가 뭐냐, 킬러가.

 순간 조명이 체리가 빠져나간 무대 구석의 반대쪽으로 쏠린다. A군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A군: Z양!

 Z양, A군 쪽을 바라본다. A군이 Z양이 서있는 쪽으로 걸어온다. 무대가 다시 고루 밝아진다.

 A군: Z양, 잘 있었니?

  Z양(침묵하다가): 너, 어떻게, 여기? (아니, 아니, 아니, 하고 말하면서 고개를 젓는다.) 너 왜 여기 있는 거야?

  A군: 오는 길에 어제 나랑 죤슨이랑 만났던 거리를 지나갔잖아? 그거 보고 반가워서 쫒아왔어. 근데 한 발 늦었네. 체리한테도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Z양: 아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A군의 정강이를 발로 찬다.) 너 학교에서 나간 뒤로 어디 있었어? 집에도 안 들어갔다면서! 지금 학교가 난리라고! 게다가 너 어제 진짜 죤슨이랑 만난 거야? 그놈 말이 사실이냐고! (뜸들이다가) 일단 다 필요 없어. 체리가 널 걱정하고 있어.

  A군: 말하자면 길지만, (Z양의 손에서 편지를 뺏어든다.) 지금은 내 말을 들을 때가 아닌 거 같아. 체리를 찾아야지. 어디서 울고 있을 지도 모르잖아.

  Z양: 그거야, 그렇지만.

  A군: Z양은 어차피 나 같은 거 바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저 학교가 지겨워서 나간 멍청한 아이라고 생각하지? 그러니까 나보다 체리를 더 챙겨야지.

  Z양: 알고 있어. 얕보지 마. 체리랑 나는 각별해. 둘이서 우리 아빠가 준 오백 원으로 딱지 다섯 개를 같이 사러 간 적도 있고, 오백 원으로 다섯 개를 뽑을 때 체리가 두 장을 골랐고, 그중 하나에 왕 딱지 쿠폰이 나오자 서로 자기 거라 우겼고. 그러다 내가 체리의 딱지를 다 찢어버린 적도 있어.

  A군: 그래, 그러니까 얼른 체리를 쫒아가야지.

  Z양: 안 그래도 갈 거야. (망설인다.)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A군: 체리는 곧 이리로 올 거야. 너한테 사과를 하러 말이야. 체리는 그런 애니까.

  Z양: 너 체리랑 한 번도 얘기한 적 없으면서 그걸 어떻게 알아?

  A군: 계속 날 봐서 나도 의식했거든.

  Z양: 넌 진짜 핵폐기물 같은 새끼구나! (A군의 정강이를 발로 찬다.) 그걸 알면서 체리한테 아무 말도 없이 학교를 나간 거야?

  A군: 잘 생각해봐, Z양. 난 학교를 그만 두고 따로 하고 싶은 일이 있어. Z양이 그걸 바보 같은 결정이라 생각한다면 나도 할 말이 없지만, 그런 내가 학교에서밖에 볼 수 없고, 대학생이 되면 멀리 떠날 체리한테 다가갈 수는 없잖아. 어쨌든 곧 체리가 올 거야.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오늘은 내 차례가 아닌 거 같네. 그럼 이만 가볼게.

   A군, 무대를 빠져나가려고 한다.

 Z양: 잠깐만, A군!

  A군(뒤를 돌아보며): 응?

  Z양: 다른 게 아니라, (머뭇거리다가) 체리가 이런 짓을 한 것에 대해선 사과할게. 무서웠을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체리는 내가 딱지를 전부 찢어버렸을 때, 그러니까, 며칠 간 삐쳐 있다가 내게 먼저 사과하러 와줬어. 이백 원 때문에 오십 개 넘는 딱지를 찢은 나한테 말이야. 체리를 이상한 아이라 생각하지 말아줘.

  A군: 당연하잖아. 나중에 또 보자.

  Z양: 나중에 또?

  A군: 물론이지! 난 학교를 나왔을 뿐이지 너희를 안 본다고 한 적은 없어.

 A군 퇴장한다. Z양이 멍한 표정으로 A군이 퇴장한 쪽을 보는 틈에, 반대편 무대 끝에서 체리가 조심스럽게 걸어온다. 체리가 Z양의 옷깃을 잡아끌고, Z양이 깜짝 놀라 돌아본다.

 Z양: 악! 진짜 뭐야!

  체리: 힉! (놀라서 물러난다.)

  Z양: 아니, 아냐, 체리. 놀라서 그랬어. 다른 생각 중이었거든. 진짜야. 가짜면 스카이에 붙어도 대학 따위 안 가고 소말리아로 갈게. 소말리아로 가는 원양어선을 탈게.

  체리: 진짜? (머뭇거리다가 Z양을 껴안는다.) 미안해, Z양! 아까는 내가 말이 너무 심했던 것 같아. Z양도 십 년이 지나도록 그날 왔을지도 모를 두꺼비를 아쉬워했을 텐데.

  Z양(곤란한 표정으로 체리에게서 떨어지며): 아니,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체리: 응?

  Z양: 아냐, 아냐. 괜찮아, 체리. 그날 기억나? 내가 실수로 두꺼비집을 무너뜨려서 네가 울었잖아. 우리 그날 두꺼비집만 만든 게 아니잖아? 네가 우리 집 화단에 있는 백합꽃이 비를 맞으면 아플 거라면서 모조리 뽑았잖아. (부끄러운 표정으로) 네가, 그걸로 화관을 만들어서 내게 씌워줬잖아?

  체리: 응, 그런 일도 있었지.

  Z양: 그거 때문에 우리 엄마한테 혼났고, 둘이서.

  체리(미안한 어조로): 으응, 정말 미안해 Z양. 난 구제불능인가 봐.

  Z양: 아니,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야. (머뭇거리며) 네가 만든 화관, 정말 예뻤어. 지금은 나랑 어울리진 않겠지만, 다음에 또 만들러 가자. 그땐 내가 만들어줄게. 만들어 주거나 박살내거나, 으악, 몰라!

 Z양, 체리의 머리를 헝클어트린다.

 

  체리: 그만해, Z양! (Z양을 밀친다. 기분 나쁘다는 표정은 아니다.) 어쨌거나 미안해. Z양의 말이 다 맞 아. 나는 A군에 대해서 잘 모르고, 멋대로 A군에게 내 환상을 뒤집어 씌웠어. 내가 A군에게 제대로 말을 걸었다면 학교를 나가지 않았을지도 몰라.

  Z양(망설이다가): 네가 조금은 잘못했지만 그래도 전부 네 잘못은 아니야. A군 그 벽창호도 잘못은 했어. 나도 그러니까, 얘기를 안 나눠봐서 잘 모르겠지만, 다음에 만나면 네가 말을 걸면 되지. 그렇지?

  체리(고개를 흔든다.): 아냐, Z양. 나는 미안해서 아무 말도 못할 거야.

 (무대 암전)

 체리: A군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니까, 나는 끝내 아무 말도 못할 거야.

7. 며칠 후 아침 자습 시간 - 교실

 (무대가 밝아진다)

 다시 책상 네 쌍을 놓는다. 죤슨은 그림을 그리는 중이고, Z양은 교실에 없다. A군의 자리엔 체리가 앉아서 머리를 빗고 있다. 

 Z양(목소리만): 그날 이후 며칠이 더 지났다. 체리는 A군을 걱정하고는 있지만 이전처럼 멍청한 소리는 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도 마음이 쓰였는지 A군의 자리에 앉아 그의 책상을 치우지 말라며 선생에게 농성을 하고 있었다. 그건 체리에겐 꽤나 중요한 일이었다. 오늘도 그녀는 A군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물론 나는 그때 더욱 중요한 일을 하고 있었다.

  죤슨: 넌 왜 여기 앉아 있는 거냐?

  체리: 네 알 바 아니잖아, 오리털 잠바 매니아.

  죤슨: 오리털 잠바가 뭐 어때서.

  체리: 네 아빠 거 같잖아. 아직 가을인데 왜 그런 걸 입고 다니는 거야, 도대체.

  죤슨: 그건, 내가 키가 작으니까.

  체리(빗을 내려놓는다.): 키가 작은 게 뭐 어때서. 무슨 그림 그렸는지 봐도 돼?

  죤슨: 아니, 그건 안 돼!

  체리: 그러지 좀 말고, 냄새나는 오리털 잠바 매니아야. 

 체리가 죤슨의 연습장을 빼앗고, 죤슨이 다시 빼앗으려고 달려들다가 체리가 앉아 있는 책상을 짚는다. 죤슨, 체리의 책상을 물끄러미 본다. 체리는 연습장을 번쩍 들고 있다가 의아한 표정으로 내려놓는다.

   체리: 왜 그래, 죤슨, F.

  죤슨: 아니, 이게 뭔가 해서. 이것 봐. A군이 톱으로 파놓은 자리에서 뭔가 돋았어.

  체리(책상을 보고 놀란다.): 이건 새싹이잖아? 뭐지, 이게? (무대 구석으로 달려간다.) Z양? Z양! 이 화관 멍청이, 그러길래 내가 햄버거 많이 먹으면 배탈 난다고 했잖아!

 (무대 암전)

8. 방과 후 - 밤거리

 (무대가 밝아진다)

 어둑한 조명이 내리쬐는 무대를 Z양이 홀로 걷고 있다. 무대 중앙까지 걸어간 Z양은 주변을 살피다가 헛기침을 한다.

 Z양: A군, 혹시 거기 있니?

 관객석 쪽에서 A군이 나온다. A군은 후줄근한 작업복 차림이다.

 A군: 거기가 어디냐고 한다면 잘은 모르겠지만, 여기 있어. 무슨 일이야?

  Z양: 무슨 일이고 자시고. (한숨을 쉰다.) 여기서 죤슨이랑 너랑 만났다고 해서 와봤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으니까.

  A군: 이 근처에서 일을 하고 있거든. 숙소에 가는 길이었어.

  Z양: 네 책상에서 새싹이 돋았다고 전해주러 왔어. 그게 볼일 전부는 아니지만, 보니까 네가 파놓은 틈에 수국이며 봉선화며 꽃을 잔뜩 심어 놓았더라. 다른 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하나는 싹을 텄어.

  A군: 어떤 꽃이었는데?

  Z양: 백합이었어.

  A군: 체리가 좋아했겠네.

  Z양: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어. 아마 인류의 존재를 의심하던 명왕성인도 체리의 울음소리 때문에 우리를 알아챘을 거야. 운이 나쁘면 말머리성운에 사는 외계인이 공격해올지도 몰라.

  A군(웃는다.): 너 보기보다 이상한 소리 잘하는구나?

  Z양: 체리한테 옮은 거지, 뭐. 어쨌든 첫 번째 볼 일은 끝났어. 이제 다음, 죤슨이 봤다는 기차는 뭐고 너희 집은 편지에 파묻힌 채로 어떻게 살았는지, 그리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학교도 안 나오고 집에도 안 들어가고 여기서 이러는지 알고 싶어.

  A군: 죤슨이 본 기차는 무슨 뭐야? 난 그날 바바리맨 아저씨랑 죤슨이 이상한 말을 하기에 말린 것뿐이야. 변태 아저씨가 죤슨의 명찰을 보고 같이 일하자고 했거든. 정말 이상한 아저씨야. Z양도 밤에 돌아다닐 땐 조심해.

  Z양: 죤슨 그 놈, 역시 병신이었구나.

  A군: 죤슨이 보기엔 기차가 보였을지도 모르지. 나쁘게 생각하지 마. 그리고 우리 집은 오래 전에 이사를 갔어. 너희가 갔던 곳은 빈 집이었을 거야. 엄마 아빠가 체리의 글자를 읽지 못해서 다행이었어. 물론 나도 읽지 못했지만, 덕분에 체리는 무사했잖아?

  Z양: 그러네. 체리가 인류에게 도움이 될 때가 있다니, 놀라워. 그럼 마지막 질문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답할래?

  A군: 글쎄. (Z양이 서있는 곳 옆에 관객석 쪽을 바라보고 주저앉는다. 머뭇거리다가 Z양이 조심스럽게 A군의 옆에 앉는다.) Z양은 머리가 좋지? 우리 학교뿐만 아니라 전국 순위권이잖아. 

  Z양: 그게 뭐 어쨌는데?

  A군: Z양은 내가 학교를 그만둔 게 바보 같은 짓이라 생각하지?

  Z양(A군의 등짝을 때린다.): 당연하지. 멍청한 놈아.

  A군: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Z양, 너는 뉴스도 자주 볼 거라 생각해. 뉴스를 보면 알겠지만 매해마다 학생들이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중요하게 다룬다고,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하면서 말이야. 누구는 왕따를 당해서, 누구는 입시 스트레스 때문에 목숨을 끊는대. 그걸 보고 많은 사람들이 슬퍼하지. 그런데 다들 며칠이 지나면 짝사랑 하는 여자애나 가을 신상품을 사느라 모두 까먹어버려. 나는 죽지는 않았지만, 너희들도 금방 나를 잊어버릴 거야. 부모님도 그러시겠지. 다들 일하느라 바쁘시거든. 그러니 학교를 그만둔 거야.

  Z양: 잠깐만, 마지막 종결이 납득되지 않는데?

  A군: 나는 국어도 수학도 과학도 다 좋아하지 않아. 내가 좋아하는 건 따로 있어. 초등학교에 처음 등록하러 갈 때, 나는 아빠의 손을 잡고 있었어. 매일 아침 엄마는 나를 깨워 학교에 갈 시간이라 했어. 학교에 가면 자리에 앉아있어. 내 책상 속은 체리의 편지가 가득하고, 내 사물함 속도 체리의 편지가 가득했어. 그리고 체리는 나를 바라보지. 나는 오줌도 참고 거기에 앉아 있었어. 전부 체리의 잘못은 아니었어. 그럴 수도 있는 거니까. 담임도 내가 아무 말썽 없이 있기를 바랐잖아? 어쨌든 학교에서 내 땅은 책상밖에 없었어. 하지만 Z양, 나는 그런 걸로 만족 못 해. 내 땅이 아니더라도 더 넓은 곳을 보고 싶었어. 초등학생 때부터 여행가가 되고 싶다 했는데 아무도 듣지 않더라. 그래서 학교를 그만둔 거야. 일을 해서 내 힘으로 돈을 벌어 여행을 갈 거야. 더 넓고 많은 땅을 볼 거야.

  Z양: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일자리를 잡고 해도 늦지 않잖아, 그건.

  A군: Z양은 역시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괜찮아. 나도 Z양을 이해하지 못하거든. Z양은 학교를 졸업하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일자리를 구한 뒤에도 지금의 우리로 남아있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그땐 이미 어른이야. 나는 어른이 되기 싫어. 어린애로 남아있고 싶은 거야.

  Z양: 물론 나는 널 이해하지 못해. 네게 이해를 바라지도 않아. 나도 너처럼 그런 시절이 있었거든. 지금은 그때의 나랑 완전히 다르지. 네 말을 듣고 깨달았어. 내게 잘못이 있었다는 걸 말이야.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넌 진짜 멍청하다는 걸 알았지!

 Z양은 A군의 머리를 후려친다. A군, 놀란 표정으로 Z양을 바라본다.

 A군: 아프잖아!

  Z양: 아는 척 하지 마, 버러지 같은 놈아! 뭐, 뉴스를 보면 매해 누가 죽고 어쩌고 한다고? 그래, 그렇겠지. 그래서 너도 학교에 계속 있으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거잖아? 그래,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 나도 예외는 아니야. 학교는 딱히 유쾌한 곳도 아니고, 우리를 존중해주지도 않아. 네가 학교를 그만두고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걸 이해 못한다는 게 아니라고!

 A군, 멍한 표정으로 Z양을 바라본다.

 Z양: 매일 방구석에 처박혀서 뉴스만 보니까 모르지. 넌 아직 뒈지지도 않았으면서 왜 걔네랑 너를 동일시하는 건데. 네가 그렇게 부끄럽니? 그거야말로 걔네한테 잘못하는 거잖아. 넓은 곳을 보고 싶다면 방귀 냄새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가 봐. (머뭇거리다가) 난 우리 엄마를 싫어하지만, 그렇게 살고 싶지도 않지만, 나를 이해하지도 못하지만, 우리 엄마는 매일 동네 아줌마들이랑 음식물 쓰레기통 앞에서 날 자랑스러운 딸이라 하고 다닌다고! 부모란 다 그래. 네가 못 본 거 뿐이라고!

  A군: Z양?

  Z양: 네가 정말 넓은 곳을 보고 싶다면 일단 네 엄마 면상부터 제대로 보란 소리야. 십분 에펠탑 보면 네가 좀 더 풍요로워진 것 같니? 돈 처바르고 외국 나가서 그 꼴 보는 것보다 말이야. 엄마 몰래 밤낚시 가서 물고기나 뚫어져라 보는 우리 아빠가 더 대단해.

 A군: 저기, Z양?

 Z양: 그리고 애새끼로 남아있고 싶다는 소리는 또 뭐야. 넌 애가 뭔지는 아니? 애는 하루가 지날수록 무럭무럭 자란다고. 하루하루 새로운 걸 느끼고, 받아들이는 게 애들이란 말이야. 여덟 살 장래희망에 얽매여서 더 크지 않겠다면 넌 이미 훌륭한 어른이야! 넌 넓게 보고 있는 게 절대로 아니야. 네가 보고싶어 하는 풍경은 십 년 동안 숙성 되서 다 썩었겠다!

 A군: Z양, 그게. (머뭇거린다.)

 Z양(A군의 옆에 다시 앉는다.): 학교에 오지 않아도 되니까 부모님한텐 찾아가서 제대로 말씀드려. 아니, (머뭇거린다.) 학교에도 꼭 와. 괜히 멋있는 척 하지 말고 말이야. 진짜 멋있는 건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말을 당당하게 하고, 부모님이든 우리들의 말이든 수용하고, 들을 건 듣고, 또 듣고 싶지 않은 건 반박하는 게 멋있는 거라고. 넌 그냥 도망자잖아, 지금은.

 A군: 아, 그게. (머뭇거리다가) 내가 잘못했어, Z양.

 Z양: 당연하지. 다른 사람들한테도 미안하다고 말해라. 너 휴일 때 바쁘겠다. 보아하니 일용직 노동자 같은데.

 A군(웃는다.): 그러게. Z양은 나를 무시할거라 생각했는데 내가 Z양을 무시하고 있던 것 같아. 미안해.

 Z양: 이아손이 황금 양털 뜯어 먹는 소리한다. 아니야. 나도 너랑 비슷하니까.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제 갈래. 오늘은 왠지 엄마한테 어릴 적 좋아하던 재즈 밴드에 대해 물어보고 싶어졌어.

 A군: 미안, 내가 시간을 끌어서.

 Z양: 됐네요. 어차피 또 볼 거잖아?

 A군: 응?

 

Z양, 무대를 빠져나가다가 A군을 돌아본다.

Z양(손을 흔들면서): 네가 또 볼 수 있다고했잖아!

 9. 점심시간 - 상담실

  Z양(목소리만): 놀이터 정자에 앉아 윷놀이를 하는 할아버지들은 자주 우리들을 흘기며 떠든다. 요즘 애들은 버릇이 덜 들었다고, 치마가 저게 뭐냐면서 말이다. 그들의 대화는 항상 옛날이 좋았다는 말로 끝난다. 그러나 할아버지들은 나쁘지 않다. 우리도 중학생 때가 좋았는데, 초등학생 때가 좋았는데, 유치원 때가 좋았는데, 하면서 과거로 돌아가길 원한다. 과거에 왕따를 당한 아이도 있고, 사고를 당한 아이도 있다. 그런 애들도 과거를 돌아가 나쁜 일들을 피하고 싶다 할 것이다. 나 역시 과거로 돌아가면 체리의 딱지를 찢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전부 착각이다. 체리의 딱지를 찢어서 무지 미안했던 어린 나는 그날 그곳에 두고 왔다. 어린 Z양은 아직도 그 자리에 혼자 반성을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과거로 돌아가지 않고, 어린 Z양의 몫만큼 체리를 챙겨줘야 하는 것이다. 나도, 체리도, 죤슨도, A군도, 다들 그렇다.

(무대가 밝아진다)

무대 중앙에서 조금 구석으로 쏠린 자리에 책상 하나와 의자 둘을 놓는다. Z양과 선생이 의자 하나씩 자리를 잡고 있다. 조명은 그곳을 집중적으로 비춘다.

  Z양: 제 얘기는 끝났어요. 그래서 A군은 집에 돌아왔겠죠?

 선생: 네 말이 전부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머리를 긁는다.) 어쨌든 부모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잘 돌아온 모양이다. 자퇴는 철회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지만 일도 하고 검정고시도 준비하는 것 같다. 그래서 체리랑 죤슨은 잘 지내고 있니?

 Z양: 걔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지만 말이에요.

Z양의 말과 함께 책상을 비추던 조명이 꺼지고, 중앙에서 반대쪽 구석으로 쏠린 자리에 조명을 집중한다. 죤슨과 체리가 그곳 위에 선다. 죤슨은 묵직한 봉투를 들고 있다,

 죤슨(봉투를 내민다.): 체리, 저기, 이거 받아!

 체리(봉투를 받는다.): 이게 뭐야? 윽! (무거워서 바닥에 닿는다. 상체를 숙인 채 체리는 봉투를 열어본다.) 뭐야, 이건. 전부 아이스크림이잖아.

 죤슨: 그거, 내 전 재산으로 샀어.

 체리: 뭐? 전 재산으로 아이스크림을 샀다고? 죤슨, 너 아이스크림 좋아해?

 죤슨: 아니, 너 아이스크림 안 좋아하니?

 체리(입술을 내민다.): 별로 좋아하진 않는데? 이거 나 주는 거야?

 죤슨(실망한 표정으로): 아, 응.

 체리: 일단 이거 교실로 가져가게 좀 도와줘. 그리고 이런 거 필요 없어. 뭐야, 진짜 오리털 너, 머리 이상한 거 아니니? 이래서 머리 나쁜 애들은, 참.

죤슨, 실없이 웃는다. 둘이서 같이 봉투를 든다.

체리: 아이스크림은 됐으니까 다음엔 말이야. (웃는다.) 날 그려줘. 너 그림 잘 그리잖아.

조명이 책상이 있던 쪽으로 향한다. 죤슨과 체리 퇴장.

 Z양: 그 아이스크림 봉투, A군 책상 위에 놓아서 잘 자라던 백합꽃이 죽었어요. 체리가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죤슨이 체리의 초상화를 그려주자 바로 그쳤지만요. 어차피 책상 위에 돋은 백합이니까 오래 가지 못하고 시들었을 거예요.

 선생: 멍청한 애들끼리 잘 어울리는구나.

 Z양: 진짜 멍청한 놈들이죠. 어찌나 멍청한지 애들이 둘이서 사귄다고 쑥덕거리는 것도 모른다니까요.

 선생: 알겠다. Z양 네가 참 잘해줬구나.

 Z양: 별 일 아니었어요. (Z양, 책상 옆에있던 가방을 든다.) 이제 가도 되나요? 할 일이 있어서요.

 선생: 아, 그래. 수고했다. 얼른 가서 수업준비 해야지. 가방이 튼실해 보이는구나.

 Z양: 네. 그럼 가보겠습니다. (의자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인 뒤, 두어 발짝 걸어간다.)

 선생: 잠깐, Z양.

 Z양(선생을 돌아보며): 네?

 선생: 이번에 수행평가에서 전부 A를 맞았더구나. 이대로 시험도 잘 치렴. 기대하고 있으마.

 Z양: 아, 그런가요. (부끄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매만진다.)

 선생: 왜 그러니?

 Z양(돌아서며):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제가 A에 어울리는 애인지 궁금해서요. 

책상 쪽에 쏠린 조명이 Z양이 걷는 길 위를 따라가며 비춘다. 무대 구석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에 Z양이 멈춰 선다. 조명도 멈춘다. A군의 Z양의 곁으로 걸어온다. 그는 여전히 추리닝 차림으로, 기자재가 그려진 판자를 들고 있다.

 Z양: 어때, 일은 좀 할만 해?

 A군: 응, 쉬는 시간도 많아서. (판자를 내려놓는다.) 조금 힘들지만 괜찮아. 엄마 아빠한테도 허락 받았고. 그보다 무슨 일이니?

 Z양(수줍게 웃는다.): 모르는 척 하지 마. 점심시간에 빠져나왔다가 돌아가는 것도 몇주 째인 걸. (가방을 열고 도시락을 꺼낸다.) 자, 오늘 점심이야.

 A군(머리를 긁으며 웃는다.): 정말 미안해, Z양. 그리고 고마워. 아 그리고, 또, 글쎄,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나?

 Z양(한숨을 쉬며): 그럴 땐 말이지.

(무대 암전)

 Z양(목소리만): 우리도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면 옛날이 좋았다고 쑥덕거릴지도 모른다.자전거를 타고 가던 꼬맹이가 우릴 보고 저렇게 늙지는 않겠다고, 주제에 인생설계를 할지 모르는 문제다. 곰돌이가 그려진 잠옷을 입고 동화책이 없으면 잠을 못 자던 Z양은 이제 없다. 엄마처럼 되고 싶다던 화장조차 할 줄 모르는 Z양도 이제 없다. 대신 엄마처럼은 살고 싶지 않다고 하는 애늙은이 같은 내가 아직도 있다. 하지만 언젠가 내 딸이나 아들도 나처럼은 살고 싶지 않다고 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나는 지금보다 더 무럭무

럭 자라서 아이들의 엄마가 되었을 테니까.

-fin


 

드라마부문 당선 소감

 

나의 글이 아니라 우리의 글 쓰고 싶어
 대학교에 처음 들어왔을 때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너 시 써, 소설 써?" 였다. 처음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던 때를 기억한다. 누구나 처음 글을 쓸 땐 그저 쓰고 싶었을 뿐이지, 소설이나 시, 희곡, 시나리오 같은 갈래에 집착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를 쓰면 어떻고 소설을 쓰면 어떤가. 심지어 희곡을 쓰면 또 어떻고. 나는 꼭 시와 소설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 할 것 같은 뉘앙스의 질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갈래든 일단 써보고 싶었다.
 투고한 작품은 내 생애 첫 희곡이었다. 단순히 희곡 관련 강의를 신청했고, 희곡을 쓰는 강의였기에 탄생한 작품이었다. 기본적인 형식도, 언어도 모른 채 이틀 만에 쓰고 투고한 작품이 상을 받게 되었다는 점이 감격스럽고, 또한 작품 속 인물들에게 미안하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한 번 쯤 무언가에 홀린 듯 후다닥 써버릴 때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들 다음날 글을 다시 보고 좌절하게 된다. 나는 진득하게 글을 구상하고 써내려가지 않고 무작정 쓰고 보는 타입이라 어떤 글을 쓰든 미안함이 남는다. 미안함이 남는다는 건 글과 나 사이에 작은 신뢰 관계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라 믿는다.
 나 같은 모자란 동생을 5년 전부터 챙겨준 재인이형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이번 학기 내내 내게 밥을 먹여준 준우형에게도 감사한다. 준우형에게선 오늘도 라면 한 봉지를 얻어왔다. 내 저녁이 될 것이다. 그리고 어제 뜬금없이 날 불러내 술을 사준 이미령 후배님에게도 감사한다. 중앙대 문예창작과에 재학 중인 기저귀가 어울리는 남자, 승열이에게도 감사한다. 물론 곧 서른이 되는 정휘림 누나에게도 감사한다. 또한 희곡을 쓸 마음이 들게 만들어준 김경주의 시극 <블랙 박스>에게도 감사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감사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이번에 투고한 작품의 등장인물들이다. 물론 그들은 종이 속에 인쇄되어 있을 뿐이지만, 바꿔 말하면 종이 속에서라도 결국 '살아 있다' 는 말이다. 그들이 없었으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항상 나의 글이 아니라 우리의 글이라 믿으며 쓰고 싶다.


 

드라마부문 심사평

시간의 기록으로서의 글쓰기
 이번 원광 김용문학상 현상문예에 접수된 희곡(시나리오)은 지난해보다 훨씬 적었다. 희곡(시나리오)이 장르적으로 시나 소설에 비해 낯설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희곡과 시나리오가 연극과 영화의 토대라는 점을 생각하면 오히려 더 많은 관심이 요구된다. 물론 응모 작품이 많아야 우수한 작품을 선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국 대학생을 대상으로 문예공모전을 개최하는 것은 작가가 되려는 대학생들에게 도전의 기회를 제공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더 많은 작품을 기대하는 것이다. 
 글은 시간의 기록이다. 이번 공모전 작품들에 기록된 시간은 우울하고 어둡다. 시대가 그런 탓일까, 무겁고 지치고 무료한 시간의 기록들은 힘든 억압을 걷어내려는 듯 살인, 불륜, 사기 등 사뭇 극단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다. 시대가 험하다고 글까지 험할 필요는 없다. 적당한 거리를 확보하면 아주 시원한 웃음을 줄 수 있는 글이 나올 수도 있다.
 2편의 작품을 최종 심사에 올렸다. <최후의 만찬>은 일반적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소재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관심이 갔다. 그러나 독특한 소재가 바로 훌륭한 글이 될 수는 없다. 그럴수록 가공의 칼은 더욱 예리해야 한다. 소재의 독특성은 자칫 강한 충격으로 감동을 삼켜버릴 수 있다. 인육을 먹고 싶은 이유에 대한 필연성이 없는 점이 결정적인 흠이다.
 <A군의 실종을 우리 멋대로 보고 합니다>는 즐겁지 않은 고등학교 현실을 '쿨'하게 진술하고 있다. 희곡은 진술하는 문학 장르가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소설에 적합했던 것 같다. 너무 많은 대사는 극적 긴장감을 떨어뜨린다. 그러나 장르적 부적합이 극적 긴장을 만들고 있다. 또한 시적 대사와 동화적 기법이 참신했다. 무엇보다 지나온 시간을 문학적으로 통찰하는 힘이 있다.
 그밖에 이주여성의 부당한 현실을 수사극 형식으로 쓴 <김형재 살인사건>과 현대인의 피곤한 심적 상황을 초사실적으로 표현해 본 <짐승의 날>도 시대를 반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 했다. 그러나 두 작품 모두 사건의 진행이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문제가 있다.
   우리는 <A군의 실종을 우리 멋대로 보고 합니다>를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선정하기로 합의했다. 당선작을 내지 못해 아쉽다. 이번에 작품을 보내 준 모든 학생들에게 감사하며, 앞으로도 더욱 감동이 담긴 글을 쓰길 기원한다.

심사위원: 이상복(연극평론가, 원광대학교 문창예창작과 교수), 신귀백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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