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우리 조상은 동굴에 간단한 그림을 그려서 의사를 표현했고, 이후 한자가 들어오게 되면서 지명, 인명 등을 한자로 표기하기 시작했다. 필자는 앞으로 몇 주에 걸쳐서 선조들이 우리말을 표기하려 한 방식에 대해 훑어보고, 나아가 세종대왕의 우리말에 대한 인식까지 알아보려 한다. /편집자 친구와 톡을 하다 보면 '한대(요)/한데(요)', '가재/가제'
일본 강점기, 조선음식 말살정책에도 익산에는 최고의 맛집이 버티고 있었다. '조선 맛 보이는 우리 요리점'(동아일보 1930년 1월 10일)이 바로 '해신관'이다. 해신관은 우리 전통요리를 지킴으로써 '조선인 체면을 세웠다'고 하는데, 지금은 흔적이 없다. 익산은 우리나라의 4대 청동기문화권이자 지리적으로 산, 들, 바다가 인접하여 음식문화가 발
익산은 왕도(王都)다. 수많은 영웅들이 익산 금마에서 재기를 꿈꾸었다. 고조선의 준왕은 위만의 난을 피해 이곳에 왔고 고구려 유민 안승도 고구려의 영광을 익산에서 도모했다. 후백제 견훤은 금마의 성벽을 돋아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고 동학군 접주들은 인근 삼례에 모여 조선의 마지막 횃불을 치켜들었다. 익산은 이렇듯 인생의 9회 말 투아웃에 처한 이들이 찾아와
익산시 성당면에는 교도소 영화세트장이 있다. 1988년 탈주범 지강헌의 실화를 영화화하기 위해 지었다. 지강헌은 비정한 세상에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친다. 돈이 있으면 법 위에 군림하고, 가난하면 죄인이 되는 '더러운 세상', 익산시에서 교도소 세트장을 조성할 때 반대하는 이들이 많았다. 깡패 도시라는 이미지 때문. 익산은 인구 30만의 중소도시
우리대학 인문대 프라임사업팀은 가을에 '익산학' 학술대회를 열 예정이다. 지역학 연구는 지역의 정체성을 알아가는 일. 이에 익산과, 익산 사람들의 이야기에 대해 관심이 많은 박태건 교수(교양교육대학)의 글을 연재한다. /편집자 "이것은 오는 것이다. 구수한 즐거움에,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뽀오햔 흰 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 불이 뿌우현
S는 화가 많이 났다. 집에 못 들어간 지 나흘째. 이리역에서 40시간째 대기 중이었다. 피로와 긴장으로 S의 눈은 잔뜩 충혈되었다. 오늘 밤도 기관차 배정은 없었다. 항의를 했지만 묵살되었다. 급행료를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급행료'란 힘 있는 자에게 은밀하게 건네는 '웃돈'. '빨리빨리'가 구호처럼 퍼지던 박정희 정권 말기였다. 사회는 저임
우리대학 박물관은 1968년 1월, 지금의 전문대 별관 4층의 20평 규모의 작은 공간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19년이 지난 1987년 6월, 대학 박물관으로서는 전국 최대 규모로 건립돼 현재 박물관 자리에 단독 건물로 신축 개관을 하게 됐다. 전기시설 및 기계시설을 갖춘 지하 1층과 각종 전시실이 마련된 지상 4층으로 구성돼 있으며, 전시실은 1&mid
1987년 5월 27일 발행된 <원대신문> 542호에 우리대학 총학생회 주최로 '광주 항쟁 계승 실천대회'를 1987년 5월 18일에 열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학생들이 조직한 민주화 발전 추진위원회의 발대식과 투쟁선언문을 낭독한 후 모인 학생들은 정문과 후문으로 나뉘어 시위를 진행했다. 그러나 경찰의 최루탄 발포로 정문에서의 시위는 저지됐
4월은 잔인한 달. 영국의 시인이자 작가인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이 자신의 시 『황무지(The Waste Land)』에서 쓴 표현이다. 매년 4월에는 사람들이 많은 감정의 변화를 느낀다. 겨울이 사라지고, 봄이 무르익어 가며 설레는 마음, 중간고사로 떨리는 마음…. 하지만 이번 4월은 '세월호'가 있어서 유난히 애절한
옛날 신문을 통해 우리대학이 그동안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는지 그 변천사를 <원대신문>의 사진을 통해 소개한다. / 편집자 '캠퍼스가 아름다운 대학'하면 우리대학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지난 2004년, 인터넷 포털 사이트 엠파스 랭킹 서비스에서 실시된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학 캠퍼스는 어디일까요?'라는 설문에서 우리대학
4월 5일 식목일은 국민식수에 의한 애림사상을 높이고 산지의 자원화를 위하여 재정된 날이다. 우리나라는 조선 시대부터 온돌이 대중화되면서 땔감 사용으로 국토 대부분의 산에 나무가 부족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무분별한 벌목을 통해 목재를 가져갔을 뿐만 아니라 수피, 수엽, 수지, 소나무 뿌리까지 수탈해 갔다. 그래서 나무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의 토지 비옥
대학은 진리 탐구와 인격도야의 도장이다. 대학은 최고 학문의 상아탑으로서 진리를 발견하고 그 진리에 의한 자유의 실현에 근본 목적이 있다. 이에 대학은 스스로 독자적 문화권을 형성한다. 그 문화는 개개인의 개성을 최대한 존중하며 그 개성의 조화를 엮어 하나의 작은 범주를 형성하고 나아가 대학 문화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총체적 대학 문화의 가장 대표적
개교 70주년을 맞은 우리대학이 그동안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는지 그 변천사를 <원대신문>의 사진을 통해 소개한다. / 편집자1991년 2월 20일 O·T 기사 요약 91학년도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지난 6일부터 각 단과대학 및 과학생회 주관으로 변산 임해수련원에서 실시됐다. 신입생들에게 대학의 예비지식을 쌓게 함으로써 원만
개교 70주년이 지난 우리대학이 그동안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는지 그 변천사를 <원대신문>의 사진을 통해 소개한다. / 편집자 원대신문 제798호 1997년 3월 10일 우리대학 문화체육관과 사범대 앞에는 원광빌딩과 사회교육센터가 공사중이다. 원광빌딩의 공사는 1997년 10월 31일까지 진행될 계획이며, 지하 2층, 지상 5층으로 신축
개교 70주년이 지난 우리대학이 그동안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는지 그 변천사를 <원대신문>의 사진을 통해 소개한다. / 편집자 85학년도 신입생 입학식이 1985년 3월 2일 오전 10시 30분 대운동장에서 열렸다. 박길진 총장을 비롯해 관계 교직원, 학부모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입학식이 진행됐다. 이날 입학식은 국민의례에 이어 정갑원
개교 70주년을 맞은 우리대학이 그동안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는지 그 변천사를 <원대신문>의 사진을 통해 소개한다. / 편집자 『원광대학교 40년사』발간을 기념해 행사가 열렸다. 이 기념회는 1987년 12월 2일 학생회관 대강당에서 열렸다. 『원광대학교 40년사』는 4×6배판 1천3백여 페이지로 제작됐다. 이는 총 3천 부의
개교 70주년을 맞은 우리대학이 그동안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는지 그 변천사를 <원대신문>의 사진을 통해 소개한다. / 편집자 위 사진은 <원대신문> 제693호(1992년 11월 11일 자 발행)에 게재된, 제24대 총학생회장단으로 당선된 기호 2번 정-기영서 씨(신문방송 3년)와 부-황인철 씨(전기 3년)의 사진이다. 여학생
개교 70주년을 맞은 우리대학이 그동안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는지 그 변천사를 <원대신문>의 사진을 통해 소개한다. / 편집자 원대신문 제210호 1975년 9월 15일 아래 사진은 <원대신문> 제210호(1975년 9월 15일자 발행)에 게재돼 있는 '76학년도 신입생 모집정원' 자료다. 올해 발표된 입시전형 자료에 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