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주열 열사

출처 : 경남도민일보

 4월은 잔인한 달. 영국의 시인이자 작가인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이 자신의 시 『황무지(The Waste Land)』에서 쓴 표현이다. 매년 4월에는 사람들이 많은 감정의 변화를 느낀다. 겨울이 사라지고, 봄이 무르익어 가며 설레는 마음, 중간고사로 떨리는 마음…. 하지만 이번 4월은 '세월호'가 있어서 유난히 애절한 마음이 들었다.
 57년 전 오늘은, 가슴 아프지만 큰 의미가 있는 날이다. 바로 '4·19 혁명' 때문이다.
 1960년 3월 15일 제1공화국의 부정선거가 있었다. 이때,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에서는 자유당의 일방적인 부정선거에 격분한 시민과 학생들이 시위대를 이루어 경찰과 충돌하게 된다. 이에 경찰은 시위대에게 총을 발포했고, 총 8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된다. 그리고 4월 10일. 마산 3·15 의거 이후 실종됐던 故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한 달 만에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로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다. 경찰의 소행으로 밝혀진 이후, 또다시 분노한 시민들과 학생들은 다시 모였고,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됐다. 마침내 4월 19일에 4·19 혁명을 이뤄 낸다.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김주열 열사. 그의 묘소는 어디에 있을까? 당시 마산상고에 다니고 있었으니 마산에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오산이었다. 김주열 열사의 묘소는 그의 고향인 전라북도 남원에 있다. 지금은 익산에서 차를 타고 약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는 남원. 이곳에 우리대학 신문사 선배들의 발자취가 남아있었다.
 <원대신문> 제481호에 실린 "어메, 백두산에 태극기를 꽂을라요"에 쓰인 말을 잠깐 소개하려고 한다.  "되풀이되는 4월의 얘기를 다시 되풀이하기보다는, 그가 뛰놀던 마을, 그가 공부했던 학교, 그가 묻힌 곳을 찾아 김주열의 짧은 인생을 더듬어 보는 것이 차라리 4월을 얘기하는데 적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반적으로, 김주열 열사에 대해서는 '4·19 혁명의 도화선'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교과서 부연 설명 몇 줄로 끝난 게 전부인데, 조금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보면 그의 생애를 따라가 보는 건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주열 열사는 금지용정국민학교(지금의 금지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금지중학교에 진학했다. 모두 개근이었으며, 근면성, 인내성, 창조성, 협동성, 준법성 등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주변 사람들로부터는 '인정이 많고, 온순하며 원만한 성격'이라고 평가받았다. 또, 소풍 갈 때 가난한 아이의 도시락을 준비해 나눠 먹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김주열 장군이 남북통일을 이뤘다고 할 날이 틀림없이 옵니다"라고 어머니께 입버릇처럼 말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중학교를 마치고 남원을 떠나 마산으로 간 이유는 김주열 열사의 이모할머니가 가장 아끼는 주열을 곁에 두고자 했으며, 이모할머니를 위로하고, 공부도 하겠다는 생각으로 부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마산상고에 시험을 치른 것이 마산 유학의 동기였다고 한다.
 온순하고 원만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통일에 대한 염원이 지대한 소년. 효심이 가득하고 정도(正道)를 좇아 용기 있게 나선 김주열 열사.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최근 그의 친필 메모가 발견됐는데, 중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동문 친구에게 보낸 글이다.
 막 졸업하는 장래 유망한 소년의 마지막 글이라고 생각하니 애잔한 마음에 그를 기려본다.
 
 "졸업을 축하한다. 사막을 걸어가던 사람이 오아시스를 만날 때를 생각하여 지금은 헤어졌을지라도 장래 또 한 번 만나 보세. 군의 성공을 바라며"

   조현범 수습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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