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월 18일, 프랑스의 소설가 미셸 투르니에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철학교수를 꿈꿨지만 자격시험에서 꼴찌로 떨어진 충격으로 진로를 바꿨다. 그가 문학으로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건 마흔넷이 되어서였다. 발표되자마자 미셸에게 명성을 안겨준 첫 작품이 이번에 소개할 작품,『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다.

 1659년, 배가 난파되어 표류하던 한 영국인이 대서양의 무인도에 상륙했다. 그는 고독을 극복하고 섬을 개척하여 '작은 영국'을 건설했다. 그는 노예 '프라이데이'의 주인이자 문명화된 섬의 영주로서 28년 동안 군림한 뒤, 문명 세계로 돌아왔다. 이 작품이 바로『로빈슨 크루소(1719)』다. 그리고 1970년, 미셸에 의해 새로운 로빈슨 크루소가 탄생한다. 미셸은 작품의 배경을 대서양에서 태평양의 무인도로 바꾼다. 그리고 프라이데이 대신 방드르디라는 소년을 등장시킨다.『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서 로빈슨은 항해 도중 태풍을 만나 무인도로 밀려온다. 구조의 손길이 없자, 그는 자력으로 섬에서 탈출하기로 마음먹는다. 겨우 배가 완성되나, 그것을 바다까지 끌고 갈 도리가 없자, 절망과 피로에 인하여 로빈슨은 진창에 쓰러진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로빈슨은 섬을 개척하기 시작한다. 로빈슨은 섬에 '스페란차'라는 명칭을 붙인다. 그는 집을 짓고, 곡식의 씨를 뿌리고, 규칙을 정한다. 물시계를 만들어 일과표를 만들고, 법을 제정하여 총통이라 자칭한다.
 어느 날, 물시계가 멈추는 사고가 일어난다. 시간의 통제에서 벗어난 로빈슨은 까닭모를 자유를 느낀다. 그는 동굴에서 좁은 구멍을 발견하고는 그곳에 들어가 몸을 웅크리고 평화로움에 빠져든다. 그 후, 로빈슨은 자신이 그동안 힘써온 문명화 작업에 대해 공허함을 느낀다. 문명화 작업은 인간의 고독을 치유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금요일, 로빈슨은 야만인들의 제물이던 인디언 혼혈 소년을 구한다. 그는 자신에 비해 열등한 혼혈 소년에게 사람이나 물건의 이름이 아닌 '방드르디'라는 이름을 붙여 준다. 방드르디는 야만적이지만 미약한 존재에게조차 헌신적이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에게서 로빈슨은 문명으로 쉽게 정의할 수 없는 인간적인 특성과 순수함을 발견한다. 어느 날, 방드르디의 실수로 폭약이 터져, 섬의 문명은 파괴된다. 폐허가 된 섬에서 로빈슨은 문명의 질서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느낀다. 로빈슨은 방드르디가 계몽해야할 야만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디포의『로빈슨 크루소』는 문명의 힘으로 야만과 자연을 계몽, 개척하는 이야기다. 반면에,『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야만과 문명의 구분, 문명에 대한 인간의 집착이 헛되고 이기적인 행위임을 시사한다.『로빈슨 크루소』는 유럽열강의 신대륙 발견과 식민지 쟁탈을 통해 제국주의가 태동되던 시대에 발표되었다. 이 작품은 인류의 문명이 더 진보한 산업 시대를 예고했고, 자연과 야만에 대한 서구인의 오만을 상징했다.
 문명인인 로빈슨 대신, 야만인인 방드르디가 본 작품의 제목으로 등장하는 점도 재미있다. 원작의 '프라이데이'가 야만의 상징이자 계몽의 대상이라면, '방드르디'는 문명의 허망함을 일깨워주고 로빈슨을 자연으로 이끄는 인물이다. 여기서 섬이 있는 '태평양의 끝'이란 문명과 야만의 경계가 해체되는 세계를 상징한다. 또, 시간이나 제도, 진보에 대한 강박관념 등, 인간에게 씌워진 문명의 굴레가 사라진 세계를 뜻하기도 한다. 미셸 투르니에가 새롭게 그려낸 현대의 로빈슨 크루소는 문명 세계가 잃어버린 본질적인 영역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백재열(문예창작학과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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