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보사의 위기다"
   매년 수면 위로 떠오르는 학보사의 위기가 이젠 상투적으로 느껴진다. 수습기자로 발을 디뎠던 2016년도 위기였고, 2020년인 지금도 위기다. 대학언론 전체가 위기라고 아우성 치고 있지만, 오랜 시간 위기가 지속했기 때문인지 '위기'는 '일상'으로 여겨진다. 학보사의 위기는 요 몇 년 사이 거론된 문제가 아니다. 1998년 <경향신문> 오창민 기자가 작성한 <'세월무상' 흔들리는 '대학신문'>에서는 "근래 들어 대학신문은 학생들의 관심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며 선동적인 편집과 근거리통신망의 등장 등을 원인으로 해석했다. 2020년 <경향신문>에서도 <'대학언론의 위기' 우려 확산, 90년대 이후 정체성 혼란 심각>이라는 제목으로 대학신문의 위기를 꼬집었다.
 긴 시간 동안 이야기된 '학보사의 위기' 속에서 우리대학 영자신문사 <원광헤럴드>가 폐간을 맞이했고, <원대신문> 또한 매년 발행 횟수가 줄어드는 추세다. 일상처럼 느껴지는 위기가 대학신문을 조금씩 집어삼키고 있다. 크기가 줄어든 학보사는 학생들의 눈길을 끌만 한 힘을 내지 못하고, 학생들이 찾지 않는 대학신문은 존폐의 기로를 마주한다. 그러므로 이번 창간기념호 특집에선 <원대신문>의 역사와 나아갈 방향이 아닌, 왜 존재해야 하는지 파헤쳐 봤다.
 
  대학언론 대신 대나무숲으로
 우리대학 관련 SNS인 페이스북 '원광대학교 대나무숲'과 애플리케이션 '에브리타임'에선 학생들이 익명성을 바탕으로 학교생활과 사생활을 털어놓는다. 잡다한 말이 많지만, 대학생으로서 할 수 있는 고민이나 학교 운영 방침에 대한 불만들이 제기되기도 한다. 에브리타임은 우리대학 학생증을 인증하여 가입하는 시스템이어서 익명의 원광대학교 학생이라는 공통분모를 갖는다. 그러므로 강의에 대한 평가, 교수의 언행, 또래 학우에게만 털어놓을 수 있는 애환과 불만이 공공연하게 게시물로 올라온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인 원광대학교 대나무숲과 에브리타임이 학생들에게 공적·사적 담론의 장을 마련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접근성 또한 대학언론보다 가까워서 학생들은 학보사가 발행하는 신문보다 SNS 속 담론장에 더 귀 기울인다. 몸집이 커진 SNS 담론장은 어느덧 대학언론의 구실을 할 정도로 거대해졌다.
 인문대에 재학 중인 A 씨는 "스마트폰 화면을 몇 번만 터치하면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을 바로 알 수 있어서 에브리타임을 자주 들여다본다. 강의에 대한 것 이외에도 학생들이 올리는 사생활 이야기도 재밌다"고 전했다.
 코로나19 여파로 인한 비대면 수업을 대학언론 위축의 핑계로 둘러댈 수도 있겠지만, <원대신문>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원대신문>은 SNS 페이지와 독립적인 인터넷신문을 개설하여 운영하고 있다. 비대면 생활일지라도 다양한 방법으로 학생들에게 <원대신문>을 소개하고, 읽히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입생에게 <원대신문>을 알리려는 노력이나 기존의 독자를 묶어두려는 시도가 미흡했다. 스마트폰으로 대다수 일을 처리하는 학생들에게 종이신문을 읽어보라고 권유하는 일은 접근 방법 자체가 틀린 것 아닐까.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사건, 사고를 전달하는 신문이 오랜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원대신문>에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다. 대학 학보사 전반에 이르는 고찰이다.
 
  <원대신문>은 무엇을 했는가
 대나무숲과 에브리타임이 대학생이 애용하는 공적·사적의 장으로 자리 잡는 동안 학보사는 무엇을 했는가. 결과부터 말하자면 대학언론은 공적·사적의 장을 제공하지 못한다. 대학생들이 만드는 대학언론이 공적·사적의 장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학생들은 다른 대안을 찾았고, 그들끼리 새로운 커뮤니티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대학언론이 학생들의 갈증을 해결해주지 못했으므로 학보는 외면받을 수밖에 없었다.
 대학언론만의 탓은 아니다. 대학언론 또한 발행자와 편집인이 있는 '신문'이다. 따라서 신문은 제작 단계에서 여과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을 위해서 주간 교수라는 직책이 있고, 학생들의 생각과 학보사의 입장을 조율하는 편집장이 있다. 대나무숲과 에브리타임에 학생들이 관심을 두는 까닭은 이것들이 담론장을 마련했단 이유와 더불어 의견을 피력하 데 거침없을 수 있단 이유가 큰 비율을 차지한다. 예를 들어 이해하기 힘든 학교의 방침이 있다 치면, 여타 SNS는 학생들이 자신들의 주관된 의견을 밝히고, 주관된 의견들이 모여 객관화된 의견이 된다. 반면 학보사는 교비로 제작되기 때문에 학교와 학생의 입장 모두를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기자들과 주간 교수는 문제가 되는 대학의 현안에 대해 보이지 않는 갈등이 존재한다. 좁혀지지 않는 의견 차이로 인해 결단을 내린 학보사들이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1991년 <광운대신문> 기사 내용이 학교 측 입장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발행 중지 ▲2005년 <동덕여대학보> 학교 행정 비판을 이유로 기자 전원 면직 ▲2012년 <외대학보> 대학 측의 일방적 총학생회 선거 특집호 발행 방해 ▲2017년 <대학신문> 주간 교수의 과도한 간섭 및 편집권 침해로 백지 발행 ▲2019년 <서강학보> 학교 측이 총장 관련 보도를 불허해 전면 백지 발행
 2015년 배재정 새정치민주연합(현재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공개한 '대학언론의 자유' 조사 결과에 따르면, 45.8%가 '재단 비판보도에 자유롭지 못하다'고 답했다. 학내 신문이 최우선으로 비판하고 평가해야 하는 대상이 대학이라는 지점에서 학보사와 학교는 충돌할 수밖에 없다. 학보사라는 정체성과 학교를 향한 의존성 때문에 <원대신문>이 아닌 <원대홍보잡지> 따위로 읽힐 우려가 깊다. 그 과정을 거치며 <원대신문>은 학생들에게 공적·사적 담론의 장을 제공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SNS는 학생들의 의견이 모인 곳
 대학언론이 대나무숲과 에브리타임을 경쟁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진 않는다. 많은 학보사가 SNS상으로 드러난 학생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대학신문이 하지 못하는 공론화와 문제 제기를 SNS를 통해서 한다거나, 사적 공간이라는 점을 활용해 도의적으로 그른 사적 언행을 폭로하기도 한다. 모두 대학언론이 실행하기엔 한계점에 부딪히는 일이다. 또한, 학보사에 직접적으로 제보하지 않더라도 SNS에서는 의제를 설정하는 데 있어서 '고발', '제보'의 기능을 수행한다. 기자들이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의미 있는 도출이 가능하다. 공적이면서 사적인 공간이지만, 더 크게 목소리 내야 할 안건은 대학언론이 나서서 도와주면 된다. 학보사가 발행하는 신문은 학생을 포함해 대학교 전체 구성원, 더 넓게 지역 사회가 읽기 마련이다.
 대학언론과 대나무숲은 서로에게 이로울 수 있다. 대나무숲이 학생 개인의 의견과 가감 없는 공론을 열어준다면, 대학언론은 그들의 의견을 반영하고 학교 전체에 의제를 던지면 된다. 익명의 제보로 인해 다른 익명의 제보가 뒤따를 수 있고, 덩치가 커진 의견은 문제를 공론화하기 쉬워진다. 신중해야 할 부분은 객관성과 진실이다. 대나무숲과 에브리타임 모두 익명이 기본이므로 정확한 사실 판단은 오롯이 기자와 데스크의 몫이어야 한다.
 
  종이신문이라는 테두리 밖으로
 SNS상에서 공적·사적 공론의 장이 형성되기 전부터 디지털이란 키워드가 대두됐다. 그에 따라 <원대신문>은 변화를 꾀했다. 종이신문 대신 인터넷과 가까워진 독자들을 위해 SNS를 활용했고, 페이스북의 경우 1천 800여 명 이상의 이용자가 원대신문 페이지를 구독 중이다. 그러나 요즘 들어 이러한 노력이 시들하다. 매주 제작해 게시하던 카드뉴스는 감감무소식이며, 많은 사람과 소통하기 위해 만들어진 '휴먼스 오브 원광' 코너가 얼마나 많은 이에게 읽히는지 미지수다. 디지털이란 키워드에 바짝 다가서야 한다. 종이신문은 취재하고 편집하고 발행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그새 기사의 신선도는 떨어진다. 신선도가 떨어진 기사는 더는 뉴스가 아니다. 항상 새로운 소식을 전하기 위해선 SNS와 인터넷을 수용해야 한다. 학생들이 흥미를 느끼고, 궁금증이 생길 기사를 빠르게 전해준다면, <원대신문>에 관한 관심도 덩달아 살아날 것이다.
 그렇다면 종이신문 발행은 영양가 없는 행동인가? 그렇지 않다. 종이신문은 신문사의 근간이다. 신문사의 뿌리이면서 과업이다. 읽히지 않는 종이신문의 발행을 낭비라고 받아들일 수 있지만, 종이신문은 그 어느 수단보다 접근성이 좋다. 스마트폰으로 보는 기사와 뉴스는 제목에 끌리거나, 평소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만 찾아본다. 그러나 종이신문은 예상치 못한 기사와 뉴스를 접할 수 있고, 뒤로 가기 버튼을 누른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종이신문은 실재한다. 또한, 비대면 수업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종이신문은 각 건물 입구 가판대에 꽂혀있었다. <원대신문>의 존재를 몰랐던 사람이라도 가판대에 꽂힌 <원대신문>으로 인해 관심을 가지고 읽을 수 있다. 종이신문은 그런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존재의 필요성이 확고하다. 근간이 되는 종이신문과 소통과 소식을 책임지는 디지털신문 사이에 <원대신문>의 존폐가 걸려있다.
 종이신문과 디지털신문에 관해 이만제 주간교수(행정언론학부)는 "저널리즘의 내용과 형식이 인터넷과 모바일 환경으로 진화하는 것은 당연하며, 매체의 변화뿐 아니라 사회문화적 정치·경제의 변화를 고려, 독자와 소통하는 저널리즘의 DNA를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주체적 <원대신문>을 위해서
 학생들이 <원대신문>에 실린 글로 공론의 장을 만들 때 <원대신문>은 존재할 수 있다. 학생들이 <원대신문>을 읽고, <원대신문>은 학생들이 궁금해 하고, 알아야 할 이야깃거리를 알려주는 순환 속에서 우리대학과 학교생활이 건강해진다. 교내에서 들려오는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 학생들이 알아야만 하는 사건을 전달하며 <원대신문>과 학생 사이에서 발생하는 소통이 중요하다. 대나무숲과 에브리타임을 이용해서라도 학생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대학신문이 학교에서 발행하는 홍보 책자로 전락하지 않길 바란다. 대학신문이 학교 구성원들이 모여 떠들 수 있는 뉴스를 전달하는, 양방향으로 소통하는 존재로 거듭나야 할 때다.
 <원대신문>이 주체적으로 신문을 발행하기 위해선 기자들의 노력이 더욱 요구된다. 독자에겐 읽을 것인가, 읽지 않을 것인가라는 두 가지 선택권이 주어진다. 기자에겐 어떻게 읽게 할 것인가, 뉴스를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이 부여된다. 기사는 누군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다. 그 이상의 가치와 무게를 느껴야 한다. 기자의 이름을 걸고 내는 기사에 기자 스스로 중압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이것이야말로 <원대신문>이 폐간해야 할 이유다. 그러나 <원대신문>을 이루는 기자 모두가 각자의 이름 아래 다하는 '최선'은 <원대신문>이 존재해야 할 이유 그 자체다. 기자들이 온몸으로 쓰는 기사들이 모여 '학보사의 위기'를 밀고 나아가길 믿는다.
 
 오병현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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