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사에는 서동과 선화공주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왕위에 오른 무왕과 선화공주 부부가 지명법사를 만나러 사자사에 행차하던 중 용화산 아래 큰 못가에서 미륵삼존을 만나게 된다. 이에 왕비가 이곳에 큰 절을 짓기를 간청하자 지명법사가 하룻밤 사이에 못을 메우고 3개의 탑과 3개의 금당을 갖춘 미륵사를 창건했던 것이다. 실제로 1979년부터 시작된 미륵사 발굴 과정에서 그 밑을 파봤더니 3~4m 정도의 깊이까지 개흙들이 발견되었다. 이는 연못을 메우고 지반을 다지기 위한 것으로 하부구조를 강화하는 백제인들의 수준 높은 토목기술을 보여주고 있어 설화 속 내용이 헛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미륵사지 석탑의 해체 및 보수과정에서 발견된 사리봉영기의 109자의 글에서 무왕의 왕비가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가 아닌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내용이 확인 됐다. 또한, 사리봉영기가 작성된 시기는 무왕이 승하하기 2년 전인 639년으로 적혀 있어 미륵사 창건에 대해 혼란이 빠지게 된다. 사리봉영기의 내용을 자세히 보면 미륵사 창건과 관련된 기록에는 아주 평범하게 남편인 무왕의 만수무강을 가리키는 평범한 내용 뿐이다. 또한 중요한 것은 백제 조정의 후계자인 태자(훗날 의자왕)에 대한 내용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는 사택왕비와 의자왕이 혈통으로 연결이 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내용을 정리하자면 서동설화의 주인공인 무왕의 첫 번째 왕비인 선화공주, 그 이후 의자왕의 생모가 되는 왕비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좌평 사택적덕의 딸인 왕비는 무왕의 마지막 왕비가 되는 것이다. 

말끔하게 보수를 마친 익산 미륵사지 석탑 
말끔하게 보수를 마친 익산 미륵사지 석탑 

 미륵사는 백제 최대 규모의 사찰로 가운데 중원에는 멀리서 한눈에 보이는 거대하고 우람한 목탑이 자리하였다. 동쪽에 석탑과 가람을 만들고 맨 마지막에 서탑이 들어 셨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마지막에 들어선 서탑을 발원해 만든 사람은 사택왕비지만, 30여년 전 중앙에 가장 큰 절을 발원해서 조성한 이는 선화공주일 가능성은 여전히 높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쌍릉에서 나온 유물들을 통해 선화공주를 증거할 수 있는데 관 꾸미개가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다. 소왕릉의 것이 대왕릉의 것보다 더 세련되고 완성도가 높은데 이를 통해 대왕릉보다 소왕릉이 먼저 만들어졌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따라서 소왕릉의 주인을 무왕 생전에 돌아가신 왕비인 선화공주로 비정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소왕릉이 선화공주가 잠들어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유물과 정황적 근거로 볼 때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동아시아 왕궁 유적 중 원형이 잘 남아있는 익산 왕궁리 유적, 만일의 사태를 대비했던 오금산성, 백제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미륵사지, 백제 30대 무왕과 왕비가 잠들어 있는 쌍릉, 단일 규모로는 가장 큰 왕실 사찰인 제석사지 등 익산이 1400여년 동안 품고 있던 진실은 무왕이 미래를 꿈꾸며 천도했던 익산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서에서는 한성, 웅진, 사비 만을 백제의 수도로 적고 있다. 끊임없는 조사와 연구를 통해 익산도 백제의 수도였다는 것이 새롭게 밝혀지고 기록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우리가 앞서 언급한 익산의 백제유산과 함께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향가 '서동요'를 통해 눈여겨 볼 메시지는 당시 백제와 신라가 치열한 정치적 경쟁관계에 있었음에도 국경을 초월한 사랑에 성공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서동요를 통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당시 오랜 전쟁을 통한 갈등과 고통 속에서 '서동요'라는 향가를 통해 얼마나 평화와 화합을 염원했고 이를 통해 행복한 결말의 사랑이야기가 탄생하게 된 것은 아닌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미루어 볼 때 '서동요'가 지역 간의 경쟁과 갈등이 산재한 오늘날의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동서 화합의 희망을 전하고 있다. 미륵사지, 왕궁리유적, 오금산성, 쌍릉, 사자사지 등의 익산이 품은 유산의 대부분은 바로 이러한 상생과 평화의 메시지를 간직한 채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말을 걸고있다.

이상현(역사문화학부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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