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부캐'라는 개념이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부캐는 원래의 캐릭터와 별개로 만든 '부캐릭터'를 의미한다. 이 개념은 유재석이 자신의 부캐를 만들어 화제가 된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를 통해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부캐는 찰스 핸디가 주창한 '포트폴리오 생활자'의 개념으로 전환이 가능하다. 포트폴리오 생활자는 자신의 문화 정체성을 스스로 규정하고 자신이 속한 문화적 환경에서 자신을 직접 고용해 전일제 직장과는 별개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사회적 상황에만 유효할 것 같은 포트폴리오 생활자는 조선시대에도 존재했다. 조선시대에 포트폴리오 생활자로 활동한 인물은 바로 무신이면서 화가로 활동한 채용신(蔡龍臣,  1850-1941)이다. 

 

채용신, 무과에 급제하다
 채용신은 1850년 2월 4일 한양 북부 삼청동(현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태어났다. 통정대부 채권영과 밀양 박씨 사이에서 태어난 그의 본명은 동근(東根)이고 자는 대유(大有), 호는 석지(石芝), 석강(石江), 정산(定山)이다. 그의 집안은 7대조부터 대대로 무관직은 역임한 무인가문이다. 유년시절 부친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채용신은 1886년에 무과시험에 급제한다. 비록 늦은 나이에 관직에 올랐지만, 대대로 이어온 무관직의 맥을 이을 수 있게 된다. 무과에 급제한 그는 본명인 동근 대신에 용신이란 이름을 사용(무술 시험을 치를 때는 사용한 이름은 채동신(蔡東臣)이다.)한다.
 채용신이 무관으로 행했던 업적에 대한 기록은 족보와 『석강실기(石江實記)』(1914)의 서문, 자전화(自傳畵)인 10폭 병풍 《평생도(平生圖)》(1914)를 통해 전해진다. 일각에서는 다른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는 채용신의 무관 행적을 두고, 채용신이 양반출신 화가로 활동하기 위해 스스로 무관 경력을 만들어 낸 것일 수도 있다는 의문을 제기한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럴 가능성을 없다. 서문과 족보에 그 시기가 구체적으로 명시됐을 뿐만 아니라,『각사등록(各司謄錄)』에서 채용신이 무과에 급제해 무관으로 활동했음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전주에서 무술시험을 치르고 무관이 된 채용신은 1888년에 정6품 사과(司果)에 등용된다. 이후 그는 1880년 종3품 돌산진의 수군첨절제사에 임명되고 1891년에는 고돌산 소모별장(古突山 召募別將)을 지낸다. 1893년에는 부산진 수군첨절제사(釜山鎭 水軍僉節制使)가 된다. 1895년에 임기를 마친 채용신은 전주 우북면 장암리(현 익산시 왕궁면 광암리)에서 생활한다. 무관 시절을 보내는 동안 채용신의 성품과 치적은 동시대 사람에게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화가로서의 삶을 살다
 관직생활을 마치고 전주에서 생활하던 채용신은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당시 선원전에 봉안할 태조 어진 제작을 계획한 조정에서 채용신을 화사(畵師)로 선정한 것이다. 이는 채용신이 무관으로 활동하면서도 회화 활동을 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또한 1899년에 궁중에서 주관한 조경단(肇慶壇) 비문의 북칠(北漆)작업에 화원으로 참여한 것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리라 짐작된다. 안타깝게도 채용신이 무관이 되기 전에 그림을 그린 기록이나 작품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평생도》를 통해 무과 급제 전에도 그림을 그렸음을 짐작케 한다. 
 기록이 없다보니 후손 이영태를 통해 놀라운 일화가 전해진다. 바로 22살의 채용신이 대원군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것이다. 그 일화에 따르면, 채용신의 집안은 궁궐에 참빗을 납품했다. 그때 채용신은 참빗에 세필의 그림을 그렸다. 세필채화에 뛰어난 재주를 가진 그의 재능을 알아본 대원군은 1871년 무렵에 자신의 초상화를 채용신에게 그리게 한다. 이로써 채용신은 최고의 권세를 유지하던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의 초상화를 그리게 된 것이다. 채용신의 그림 실력은 대외적으로 알려지게 됐고, 더 많은 이의 초상을 그리게 된다.
 태조어진 주관화사로 발탁된 채용신은 1900년에 초본을 완성한다. 이때 고종으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은 그는 칠곡부사로 임명된다. 이후 화재로 인해 태조어진을 비롯한 어진이 소실되자, 다시 한 번 어진 모사의 주관화사로 임명된다. 이때 제작한 어진은 대부분 소실돼 현재  <태조 어진(太祖 御眞)>과 <영조 어진(英祖 御眞)>만이 남아있다. 또한 그는 비공식적으로 고종의 어진도 도사(圖寫)한다. 이후 어진 초본을 토대로 여러 번 고종의 어진을 모사한다. 현재 고종의 어진은 우리대학 박물관에서 소장 중이다.

 출처 :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출처 :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자신의 삶과 닮은 초상화풍을 구축한 채용신
 관직을 떠난 채용신은 전주에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조선 최고의 초상화가'로 인정받은 채용신은 초상화를 주문제작하기 시작한다. 채용신은 초상화를 그릴 때, 터럭 한 올까지 빠짐없이 세세하게 묘사한다. 뿐만 아니라, 인물의 정신까지 담으려는 전신사조(傳神寫照)의 화법을 구사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채용신이 전통회화를 토대로 서양화, 일본화를 직·간접적으로 수용하면서 자신만의 화법을 구축했다는 점이다.
 나아가 그는 초상화에 사진 기법을 수용한다. 이는 신문물과 사진술을 수용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근대사회로 전환하려는 개화운동이 확산되면서 조선인의 삶은 변화하기 시작한다. 채용신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채용신은 사진을 보고 초상화를 제작하기 시작한다. 1923년에는 정읍 신태인에 그림 공방인 '채석강도화소(蔡石江圖畵所)'를 열고 사진을 바탕으로 한 초상화를 제작하기에 이른다. 
 채용신의 초상화는 전통적인 방식의 초상화가 사진과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는 전통회화 양식을 계승함과 동시에 서양화법과 사진의 표현 요소를 활용하여 자신만의 초상화풍을 만든다. 이는 무관의 삶을 살면서 화가로 활동했던 그의 유연한 삶의 태도를 작품에 적용했기에 가능했으리라 생각된다. 이는 1인 콘텐츠와 1인 크리에이티브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이 포트폴리오 생활자 채용신으로부터 배울 삶의 태도이기도 하다.

박성호 교수(원광대 HK+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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