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수단은 바뀌었지만 전쟁은 계속된다“

 지난 3월 18일에 러시아에서는 2004년도에 있었던 크림반도 합병일을 축하하는 행사가 열렸다. 이 행사의 다른 목적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을 미화하고 선전하는 것이다. 러시아는 2022년 2월 24일 현지 시간 새벽 5시에 우크라이나를 침략하여 우크라이나 군사기지 수백 곳을 파괴했을 뿐 아니라, 민간인 아파트와 주거지에 미사일 공격을 감행해 수백 명의 인명 피해를 내고 있다. 당시 서방국가들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영토 내의 친러 반군지역에 있는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돈바스 지역만 침략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가 NATO(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하면 러시아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영토의 북, 동, 남쪽을 동시다발적으로 침략했다. 여기에는 경제적인 이유도 빼놓을 수 없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영토에 연결된 가스관을 통해 천연가스 40%를 유럽으로 공급하는데, 이러한 시스템을 용이하게 유지하기 위해 우크라이나에 친러 정부를 수립하고자 한 것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에서 "전쟁의 수단은 바뀌었지만 전쟁은 계속된다"고 말했다. 21세기의 전쟁이 경제영역에서 벌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이 90여 년 전에 일본이 만주를 침략한 역사와 유사성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도 판명된다. 1931년 9월 18일 오후 10시 30분 일본 관동군은 봉천지역의 남만주 철도를 폭파하고 중국의 소행으로 꾸민 후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만주지역을 침략했다. 일본군의 만주침략은 당시 '북벌'을 선언한 국민당 정부의 기세가 커지고, 만주 군벌인 장작림이 국민당과 연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관동군이 만주점령을 위해 세운 치밀한 작전이었다. 일본군부가 만주를 침략한 진짜 원인은 만주지역의 경제적·군사적 이권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일본군부는 만주지역에 만주친일괴뢰정권을 수립하고, 만주국을 중화민국으로부터 독립시킨 후 일본의 영토로 편입시킨다는 계획을 추진했다. 이 만주침략을 시작으로 일본은 15년에 걸친 제국전쟁인 '아시아태평양전쟁'을 감행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아시아 지역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고, 2천만 명이 넘는 인명이 희생되었다. 

1940년 9월 27일 일·독·이 삼국동맹 조인식 참가
1940년 9월 27일 일·독·이 삼국동맹 조인식 참가

여전히 드리워진 냉전의 그림자

 아시아태평양전쟁 발발 후, 1939년 9월 1일에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이로 인해 유럽, 아시아, 북아프리카, 태평양 등지에서 독일, 이탈리아, 일본을 중심으로 한 추축국과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 중국 등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의 세계전쟁이 시작되었다. 수천만의 희생자를 낸 제2차 세계대전은 1944년에 미국의 아이젠하워 장군이 지휘한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성공하면서 프랑스를 다시 되찾고, 1945년 5월에 독일의 베를린을 함락하면서 유럽의 전쟁은 종결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아시아 지역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전쟁을 지속했고, 결국 연합군은 원자폭탄까지 사용하면서 무리하게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어 1945년 8월 15일에 제2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렸다.

 전후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중국을 중심으로 한 전승국은 1945년 10월 24일에 국제연합을 창설했다. 이 기구는 침략전쟁을 일으킨 국가에 대한 강력한 제제조치를 취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세계는 다시 자본주의 진영인 미국과 사회주의 진영인 소련의 패권다툼이 극에 달하면서 조용한 전쟁, 냉전으로 접어들었다. 그 정점에 군사동맹체제인 NATO와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있다. NATO는 1949년에 유럽 내에서 반공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서유럽 국가들의 기본적인 집단방위조약이다. 바르샤바 조약기구는 서독의 재무장과 NATO에 대항하기 위해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8개국의 총리가 1955년에 체결한 군사동맹조약기구이다. 바르샤바 조약기구는 1990년 10월에 독일이 통일하면서 동독이 탈퇴하면서 1991년 4월 1일에 해체되었지만 NATO는 여전히 건재할 뿐 아니라 세력이 확장되고 있는 형세이다. 이에 소련의 NATO에 대한 경계심은 커지는 상황에서 우크라이나가 NATO 가입을 추진할 때 푸틴은 "레드라인(한계선)을 넘지 말라"는 경고를 하기도 했다. 이는 1991년에 소련이 해체되었음에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속되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진영의 냉전이 완전히 종식되지 못했으며, 결국 그 그림자로 인해 다시 전쟁이 시작됐음을 보여준다.

침략전쟁의 전쟁범죄, ''평화에 반하는 죄'

 이처럼 강력한 국제연합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침략전쟁이 발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클라우제비츠가 말한 것처럼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전쟁은 계속되었다. 크게는 6.25 전쟁, 베트남 전쟁, 걸프 전쟁 등이 있었고, 내전도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명확한 전후처리와 전쟁범죄자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인류역사상 최초로 전범재판이 열린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과 일본에서였다. 먼저 1945년 11월부터 1946년 10월까지 독일의 뉘른베르크에서 국제군사재판이 열렸다. 이 재판에서 검찰측은 공통의 계획 또는 공동모의, 평화에 대한 죄, 일반적인 전쟁범죄, 인도에 대한 죄 등 4가지 소추원인으로 전쟁범죄자를 기소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1946년 5월부터 2년여에 걸쳐 극동국제군사재판(일명 도쿄재판)이 열렸다. 전범은 A급 전범(평화에 반한 죄), B급 전범(전쟁 범죄), C급 전범(인도에 반한 죄)으로 분류되어 재판했다. 그러나 전쟁을 이끌었던 지도자들은 기소되지 않았다. 히틀러는 베를린이 함락되기 전에 자살하였고, 히로히토는 '입헌군주제'라는 전시기 일본의 정치체제 하에서는 천황에게 전쟁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미국의 판단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이 전범재판에서 주목할 것은 전쟁법규 위반 행위인 전쟁범죄 이외에 새로 추가하여 '평화에 반한 죄'와 '인도에 반한 죄'가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이다. 평화에 반한 죄는 "침략전쟁 또는 국제법·조약·협정·서약에 위반하는 전쟁을 계획하고, 준비하며, 개시하고, 수행한 것. 또는 이들 행위를 달성하기 위해 공동의 계획 모의에 참가한 것"이다. 또한 인도에 반한 죄는 "일반시민에 대한 살인·절멸·노예적학대·추방 등 비인도적인 행위, 또는 정치적·인종적·종교적 이유에 근거한 박해행위"라 규정했다. 전쟁은 일단 시작되면 평화적일수도 인도적일수도 없는 것이 당연하다. 때문에 전쟁에서 가장 큰 책임을 물어야 할 대상은 침략전쟁을 일으킨 당사자여야 한다. 전쟁에서 가장 희생되는 사람들은 무기도 없는 일반 민중이기 때문에 평화를 깨뜨리고 침략전쟁을 시작한 국가와 당사자에 대한 처벌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을 개시하면서 "민간인은 공격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우크라이나의 거센 저항과 미국·서방의 고강도 경제 제재에 부딪히면서 민간인 주거지도 가리지 않고 무차별 포격을 가하고 있다. 이는 전범재판에서 21세기에 새롭게 적용한 '평화에 반한 죄'와 '인도에 반한 죄'를 모두 위반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현재 전쟁의 추이와 결과도 중요하지만, 전쟁이 끝난 이후에 전쟁범죄자를 어떻게 처벌하느냐가 앞으로 인류의 평화에 반하는 침략전쟁을 바라보는 중요한 척도가 될 것이다.

유지아 교수(원광대 HK+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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