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연한 가을이다. 청명한 하늘, 화려하게 물드는 나무들,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진 날씨. 조만간 솔로들 마음은 간절해질 것이다. 따뜻하고 다정하게 나를 감싸줄, 내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줄 누군가에 대한 갈망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살아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욕망하는 그것, 누구나 갈망하면서도 현실 속에서 쉽사리 이루지 못하는 것, 바로 사랑. 도대체 사랑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사랑이 무엇인지 말하기보다 무엇이 사랑이 아닌지 말하기가 훨씬 수월할 것이다. 요즘 하루가 멀다하고 신문 기사로 등장하는 스토킹과 연인관계에서 발생하는 무자비한 폭력과 살인사건들은 사랑을 곡해하거나 사랑이 소유 관계로 왜곡되면서 비롯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설레던 마음이 증오와 복수로 바뀌고 급기야 상대방의 목숨을 빼앗는 지경에 이를 때 우리는 그것을 스토킹 범죄라 부르지 결코 사랑이라 부르지 않는다. 
 관계를 정리하고 싶은 상대를 향해 "나를 떠난다고? 감히 네가 나를 배신해? 나를 가지고 논 거야?"라는 분노의 마음으로 온몸이 피멍이 들도록 패고 칼로 찌르는 그 무시무시한 폭력을 사랑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 치도 변명할 수 없다. 나를 사랑했던 이가 나 아닌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고 해도 그것을 폭력으로 응징하고 처벌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왜곡된 사랑에서 비롯된 끔찍한 사건을 접할 때마다 사랑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기 위해 내가 떠올리는 문학 작품 속의 아름다운 사랑의 두 유형이 있다. 
 하나는 김소월의 "진달래꽃"의 남성 화자가 드러내는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사랑과 (자기가 역겨워 연인이 떠나겠다면 눈물을 삼키며 말없이 보내줄 뿐만 아니라 사랑의 마음을 담뿍 담아 꽃까지 뿌려주겠단다!) 너새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이 남긴 최고의 명작 『주홍 글자』(The Scarlet Letter)의 헤스터 프린(Hester Prynne)이 보여준 사랑이다. 
 "진달래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작품이니 언급할 필요가 없고 '간통녀'로 낙인찍힌 헤스터는 도대체 어떤 사랑을 했길래 이 글에서 주저 없이 "사랑한다면 헤스터 프린처럼"이라는 부제를 달았을까?
 19세기 미국소설을 대표하는 호손의 『주홍 글자』는 물론 연애소설은 아니다. 작가는 남녀관계의 로맨스나 연애 과정을 다루지는 않는다. 대신 남녀 주인공 사이에 있었을 불같은 사랑의 결과 탄생한 생명이 둘의 금지된 사랑의 '죄'를 만천하에 드러낸 뒤 그들이 취하는 삶의 태도와 심리적 문제를 주로 다룬다. 
 때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탄생하기 전 종교 박해를 피해 신대륙으로 이주한 청교도들이 매사추세츠 식민지를 건설한 뒤 12년이 지난 1642년. 작품의 시작은 남편보다 먼저 홀로 식민지로 건너왔지만 2년이 지나도록 무소식인 그를 두고 누군가와 정분을 통해 딸을 출산한 헤스터가 죄의 상징인 아기를 안고 시장터의 처형대에 올라가 군중 앞에서 치욕을 당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녀의 가슴에는 진홍빛 천에 몸소 수놓아 평생 가슴에 달고 살아야 하는 간통(Adultery)을 상징하는 화려한 A자가 붙어 있다. 죄의 씨앗을 가슴에 안고 처형대에 오른 그녀는 아이 아버지가 누구인지 밝히라는 지도자들의 설득과 훈계를 완강히 거부하고 온전히 홀로 처벌을 견뎌낸다. 이후 사형은 면했지만, 실질적으로 청교도 공동체에서 추방당한 그녀는 바느질로 생계를 유지하며 홀로 딸을 키우면서 독립적인 삶을 살아간다. 
 아비는 누구였을까? 어차피 작품 서두에서 밝혀지니 간단하게만 언급하겠다. 바로 첫 장면에서 창백한 얼굴로 헤스터에게 간통 상대를 밝히라고 종용했던 옥스퍼드대 출신의 최고 지성이자 신도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아서 딤즈데일(Arthur Dimmesdale) 목사였다. 
 헤스터는 만천하에 죄를 드러내고 치욕을 겪은 뒤 당당하게 자기 삶을 일궈나갈 수 있게 된 반면, 아서는 죄를 감추고 비겁한 자신을 학대하면서도 감명 깊은 설교로 신도들의 존경을 받으며 목사직을 유지한다. 
 헤스터는 자신과 딸을 외면한 그를 원망하는 마음도 없이 그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은 채 고독과 소외를 견뎌내며 자신의 힘으로 아이를 양육하고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돕는 삶을 선택함으로써 서서히 간통녀에서 천사(Angel), 능력 있는(Able) 여성으로서 A의 의미를 바꿔나간다. 그럼 둘의 관계는 그게 전부냐고? 그럴 리가! 궁금하다면 작품을 직접 읽어보시라.
 『주홍 글자』는 헤스터의 사랑이 왜 아름다운지 보여주는 극적인 서사 외에도 '죄'를 둘러싼 인간 심리와 인간과 사회의 갈등을 통해 미국 정신을 예리하게 포착한 호손의 대표작이다. 깊어가는 가을, 비평가들이 미국 최고의 고전으로 꼽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누군가에게 마음을 표현하고 사랑을 하는 방법을 배우길 바란다.

 

김선옥 교수(영어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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