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경제 없이 단 하루도 행복할 수 없다. 경제란 생산활동과 소비활동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자원배분, 소득분배, 교환, 분업 등이 규칙적이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현상을 의미한다. 여기서 핵심은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생산하고 공평하게 분배하여 효율적으로 소비하느냐가 중요하다. 인류의 역사는 생산과 소비의 역사이다. 경제의 성장은 과학기술과 자본축적이 주도한다. 과학기술과 자본축적의 역사가 생산 혁명의 트리거이다. 생산 혁명은 소비혁명을 낳고 문명사회를 변화시킨다. 따라서 경제를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과 문화, 그리고 역사를
흔히 고전(古典)이라 하면,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으며 높게 평가되는 작품을 뜻한다. 고전을 떠올릴 때마다 항상 생각했던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언젠가 꼭 읽겠다는 다짐이었다. 아니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당위일지도 모르겠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데 나만 모르면 창피하니까. 하지만 결심이든 아니면 필연이든, 두 번째 믿음 때문에 대부분 보지 않았다. 바로 '고전은 읽기 너무 어렵다'는 선입견이었다. 때론 수백에서 2천 년이 넘는 책들도 있다 보니 당시 저자의 생각과 언어를 정확히 이해하기 힘들었다. 너무 많은 분량도
명작'을 권해달라니. 지극히 어려운 청탁이었다. 명작을 보고 읽고 연구하는 것이 나의 직업인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것에 속할 수 있는 기준과 조건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얼른 대답하기가 힘들다. 아마 평생 명확히 대답할 수 없을 것이며, 바로 그렇기에 명작이란 좋은 것이다. 그 이름만으로도 사람으로 하여금 이렇게 큰 고민을 하게 만들 수 있으니. 그래서 결국 명작이란 뭘까? 형태론적으로 접근하여 한자를 풀어보면 이름난(名) 작품(作)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이름이 났다는 것은 단순히 유명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
최근 스마트폰과 유튜브의 대중화로 인해 사람들의 독서량이 저하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독서는 글쓰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서 자연스레 글쓰기에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도 더 늘어나는 추세이다. 나 또한 대학에 입학했을 때, 그동안 오지선다형 문제에만 길들여 있다가 1학년 1학기 첫 중간고사 때 맞닥뜨린 커다란 서술형 답안지에 진땀을 흘렸던 기억이 있다. 그야말로 '백지의 공포'였다. 나름 책을 좋아하는 편이어서 독서를 어느 정도 한다고 자부했던 나였지만, 그런 나에게도 글쓰기는 쉽지 않았다. 그 뒤로, 나는 유명한 글쓰기나 작문 관련
일요일이었고 따뜻한 봄날이었습니다. 나는 평소처럼 점심을 건성 때우고, 소파에 습관적으로 널브러져 있었어요. 일요일이었으니까 조금은 봐줄 만한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지요. 나는 일요일의 몸을 가진 사람처럼 비스듬한 자세로 소파에 누워 라이터 같은 리모컨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어요. TV에서는 일요일 정오 뉴스가 담담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뉴스를 접한 나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어요. 뉴스 헤드라인에는 "프랑스 파리의 심장, '노트르담 대성당' 불타고 있어"라는 자막이 커다란 글자로 붙어 있었기 때문이에요. 처음 노트르
우리는 수없이 많은 경계들을 넘나들며 살고 있으며 지구화의 맥락에서 서로 다른 사회와 문화의 온갖 분야에서 상호작용과 혼합이 이루어짐을 목격하고 있다. 특히 역설적이게도 서로 다른 두 세계가 맞닿은 지점, 즉 경계가 그어진 지점에서 경계가 흐려지는 현상을 발견하게 되면서도 새로운 공간과 공간 사이에 경계가 그어지고 있다. 동사의 접두어로서의 탈경계를 의미하는 트랜스(trans)는 전이하고(transfer), 초월하고(transcend), 침투하는(trespass) 것을 말한다. '트랜스'는 일방향적이지 않으며, '정착되지 않은' 이
名作의 기준이 무엇인가, 근원적 질문이 슬며시 고개를 들이민다. 고민은 핑계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결국 하게 될 터이니. 마흔두 살의 나는 아직도 이토록 점잖지 못하고 종종 위악적이다. 불안과 소요의 시간을 자기연민으로 포장한 채 말이다. 강단에 서 20대 청춘들을 지도한 지 어느덧 12년 차다. 학생들에게 대단한 학식을 전달하진 못 하지만 함께 깨달아가고 있단 믿음이 나를 버티게 했다. 서로 대등하게 고민을 나누는 관계, 드러나지 않던 그 시간에 함께 웃고 울며 학생들과 나는 자존감을 쓰다듬었다. 그렇게 함께 앉아 바라보던 것들
미국의 서부 활극은 여러 면에서 중국의 무협 소설과 비교할 만하다. 중국의 무협 소설은 모두 알다시피 강호라는 중국의 무림을 배경으로 무술 고수들의 쟁투와 무용담을 담아내고 있다. 소설보다는 영화를 통해 더 익숙한 미국의 서부 활극 역시 서부 개척 시대를 배경으로 총잡이들의 갈등과 대결을 그려내고 있다. 요즘의 문학 형식으로 보자면 장르소설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는데, 무술이든 총솜씨든 둘 다 무력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면서 이른바 그들 세계 나름의 질서를 바로잡고 정의를 구현한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어, 서로 공통되는 부분이 적
모든 어른들이 한때는 어린이였다. 하지만 그것을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다. 어린 시절 의 아름다운 일러스트에 눈길이 간 경험은 누구든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접하게 되었던 쌩텍쥐페리의 라는 도서는 그 이후 몇십년간 여러번 이사를 하는 동안에도 늘 챙겨 책장에 꽂아 두고 이따금씩 읽어보는 책입니다. 제가 어린이였을 때와 청소년이었을 때, 그리고 어른이 되었을 때마다 함께 한 어린 왕자는 늘 같은 내용이었을테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는 느낌은 어릴 적의 생각과는 사뭇 다릅니다. 이야기는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
명작이라는 건 뭘까? 사람마다 명작의 정의는 다 다르겠지만, 저는 '자기와 자기 주변의 사람의 인생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책이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제 중요한 아이덴티티 중의 하나는 한의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연구를 하는 사람입니다. 저 뿐만 아니라, 원광대학교에 몸을 담고 있는 많은 선후배동료 교수님들, 대학원생들, 학부생들의 아이덴티티도 일정 부분 학문과 연구에 있을 것이기에, 인생에 자그마한 좋은 영향이라도 끼쳤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대학원생 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1, 2』라는 책을 권해보려고 합니다. 저는 2014년
어느 날 회의에 참석차 서울에 갔다가 KTX 승차 시간이 조금 남아 용산역에 있는 서점에 들렀다. 책들을 살펴보며 발걸음을 천천히 옮기는데 『감정의 발견』이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인간공학과 감성공학을 제품개발 및 설계 등에 적용하는 연구를 하고 있고, 마음 공부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인 것 같다. 책을 바로 구매하여 흥미를 가지고 익산으로 내려오는 KTX 안에서 바로 읽기 시작했다.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에 대해 인식하고 잘 다루어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은 우리 모두가 바라는 바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원광인들이
"내가 바퀴벌레가 된다면 어떻게 할 거야?" 만약 내가 바퀴벌레가 된다면, 나의 주변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그리고 벌레가 된 나는 나의 주변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막연한 상상 속에서 뚜렷하고 명확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어떠한 방법을 떠올리든 막막하고 어지러운 상황을 헤쳐 나갈 만한 현명한 결정이 되지 못할 것이 자명하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얼핏 생각해보아도 어찌할 수 없는 재앙(災殃)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재앙의 여지가 다분한 명제는 최근 SNS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물음에 대한
고등학교 1학년 시절, 그냥 친구가 좋았다. 매일 만나도 지겹지 않았고 특별한 이벤트도 없었지만 마냥 즐거웠다. 밥처럼 물처럼 공기처럼 자석처럼 맨날 쉬지도 않고 함께 어울렸다. 여기저기 쏘다녀도 전혀 지치지 않았다. 정말로 살맛났다. 얼른 내일이 왔으면 하고 바랬다. 그러던 어느 날 약속장소에서 두 시간을 넘겨가며 하염없이 기다렸지만 친구는 인기척도 없었다. 세상에 휴대전화라는 게 없던 때라서 친구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에 한편으로는 불쾌했고 또 한편으로는 염려됐다. 맥 빠진 걸음으로 터덜터덜 귀가했더니 친구가 교통사고로 사망했
"과거에 매독은 영국사람들에게 프랑스 발진으로 불렸고, 프랑스 사람들에게는 독일 질병, 플로렌쯔사람들에게는 나폴리 질병, 일본인들에게는 중국 질병으로 불렸다." 수전 손택은 『은유로서의 질병에』에서 "상상된 질병은 상상의 타자 또는 외부의 영역과 결부된다."고 썼다. 질병은 알 수 없는 먼 곳에서 도래하는 천벌이다. 그래서 인간은 질병을 은유한다. 치료가 어려운 병일수록 질병은 추악함과 타락의 징후를 암시하는 용어와 결합된다. 염병(장티푸스), 병신(병든 신체), 지랄(간질), 문둥이(나병)처럼 질병에 대한 공포는 우리가 흔히 사용
명작(名作)은 '이름난 훌륭한 작품'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지닙니다. 명작을 권하기에 앞서 세상의 어떤 작품이 명작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합니다. 그러다 문득, 피에르 바야르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에서 언급한 "독서는 우선 비(非)독서라 할 수 있다. 삶을 온통 독서에 바치는 대단한 독서가라 할지라도, 어떤 책을 잡고 펼치는 그 몸짓은 언제나 그것과 동시에 행해지는, 그래서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그 역(逆)의 몸짓을 가린다."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그가 말하는 '역(逆)의 몸짓'은 스스로가 무엇인가를
몇 해 전, 〈인사이드 아웃〉이라는 애니메이션 영화가 크게 흥행했던 적이 있다. 모든 사람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감정을 기쁨이, 슬픔이, 버럭이, 까칠이, 소심이라는 다섯 캐릭터로 인물화하여 주인공이 새로운 삶에 적응해 가는 과정을 독창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그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문득 떠오른 소설이 있었다. 독일 출신의 작가 모니카 페트가 쓴 『행복한 청소부』라는 책에 실린 〈생각을 모으는 사람〉라는 작품이다. 생각은 감정을 일으키고, 감정은 생각을 싹틔우니 두 작품은 서로 닮은 듯하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부루퉁 아저씨는 여기
좋은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갖는 희망이지만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필력을 갖추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좋은 글을 많이 읽어야 하고, 좋은 글에서 얻어낸 예지를 바탕으로 꾸준한 글쓰기 연습을 지속해야 한다. 이 같은 맥락에서 좋은 글을 읽는데 집중하고,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는 동기부여에는 개인적으로 러브 레터만한 게 없다고 생각한다. 돌이켜 보건데 러브레터 1통을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우고, 자신의 부족한 필력을 자학하며 쓰고 또 다시 쓰기를 반복했던가?, 상대
'명작을 권하다' 코너의 원고청탁서를 봅니다. 내게 명작이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명작(名作)의 의미는 그 뜻만 놓고 보면 '이름난 훌륭한 작품'일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나에게 명작은 아직도 마음 적적할 때 찾아보는 작품으로 요약됩니다. 자코 반 도마엘 감독의 〈토토의 천국〉이나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시네마 천국〉 혹은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카모메 식당〉 같은 영화가 떠오릅니다.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어딘지 모르게 늘 한 끗이 부족해 보입니다. 오해를 줄이기 위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 끗이 부족한 영화는 역설적으로
마음을 담아 쓴 글은 스스로를 치유하는 동시에, 타인의 마음도 치유할 수 있다고 합니다. 〈원대신문〉에서 새롭게 마련한 코너 '명작을 권하다'를 통해 마음을 치유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사람은 일생을 살다가 언젠가는 죽음이라는 여행을 떠난다. 그 여행은 다른 여행과 다르게 설렘보다는 낯설다. 낯설지만 언젠가 떠나야 하는 여행, 바로 죽음이다. 누구나 언젠가 한 번은 떠나는 여행, 그 여행이 결코 낯설지 않도록 해주는 여행의 길잡이" 「낯설지만 떠나는 여행」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관하는 문학나눔 우수도
완연한 가을이다. 청명한 하늘, 화려하게 물드는 나무들,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진 날씨. 조만간 솔로들 마음은 간절해질 것이다. 따뜻하고 다정하게 나를 감싸줄, 내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줄 누군가에 대한 갈망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살아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욕망하는 그것, 누구나 갈망하면서도 현실 속에서 쉽사리 이루지 못하는 것, 바로 사랑. 도대체 사랑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사랑이 무엇인지 말하기보다 무엇이 사랑이 아닌지 말하기가 훨씬 수월할 것이다. 요즘 하루가 멀다하고 신문 기사로 등장하는 스토킹과 연인관계에서 발생하는 무자비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