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공산당이 지목한 '전범'
 얼마 전 유흥식 대주교가 한국인으로는 네 번째로 추기경에 임명됐다. 우리보다 천주교 전파의 역사가 빠른 중국에서는 1946년 톈껑신(田耕莘) 대주교가 동양인 최초로 추기경에 서품되었다. 톈 추기경이 선종한 뒤 위빈이 중국인으로는 두 번째 추기경에 임명됐다. 교황을 보좌하는 최측근이자 최고위 성직자인 추기경이었던 위빈은 '전범'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무슨 까닭으로 신부가 전범이 되었을까? 
 1945년 8월, 중국은 8년간의 항일전쟁에서 승리하였다. 승리의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중국은 내전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었다. 내전에서 승리한 공산당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포하고 전 중국을 지배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패배한 국민정부는 타이완으로 파천했다.
 내전 기간 위빈은 반공의 입장을 견지했다. 시종 공산당의 반대편에 서 있던 그는 1949년 후스(胡適)와 함께 '전범' 명단에 올랐다. 정치적 입장이 달랐다 하여 공산당으로부터는 외면당하였으나, 철저한 애국주의자였던 위빈은 위기에 처한 조국과 민족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성직자로서의 본연의 임무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세 개의 박사학위를 가진 신부
 위빈은 중국의 동북 변방에서 태어났다. 6살 때 부친, 다음 해 모친이 사망했다. 11살 때 조부를 따라 천주교 교우촌으로 이주하여 14살 때 천주교에 입교했다. 18살 때인 1919년 발생한 '5·4운동' 때 학생대표로 활동하다 학교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조모의 극력 후원에 힘입어 초급 신학원에 입학한 뒤 프랑스인 신부의 추천으로 상하이에 있는 대학에 보내졌다. 1924년 로마 우르바노대학(Pontificia Universita Urbaniana)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1925년 성토마스학원(Academy of St. Thomas)에서 철학박사, 1929년 우르바노대학에서 신학박사, 1933년 페루자대학(R. V. Perugia)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우르바노대학에 재학 중이던 1928년 12월 22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1929년 교황청에서는 아비시니아(현 에티오피아)에 특사단을 파견했다. 교황 비오 11세(Pius 11세)에 의해 특사단원에 포함되어 이때부터 국제사회에 그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31년 9·18사변 발생 시 로마에 머물고 있었다. 위기에 처한 조국을 성원할 방도를 찾던 그는 중국·이태리 우호회를 앞장서 조직하고 부회장을 맡았다. 이 단체는 이태리 조야와 연계하여 중국의 존재와 현재적 상황을 널리 알리고, 이태리인들의 성원을 이끌어내는 데 활동의 주안점을 두었다. 그의 활동을 장려하는 차원에서 에마뉴엘(Victor Emmanuel) 이태리국왕은 훈장을 내렸다. 위빈의 일생을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수식어인 '민간외교의 기재'라는 미명이 이때 비롯되었다.
 
중국 천주교회 발전을 위한 노력
 1933년 교황청은 위빈을 교황청 대사에 임명하고자 했다. 귀국하여 선교사업에 매진하고자했던 위빈은 대사직을 완곡히 사양했다. 같은 해 겨울, 공교진행회(Catholic Action) 총감독에 임명되어 귀국했다. 주요 임무는 중국 천주교회의 뿌리를 튼튼히 하고 교우들을 배양하는 데 있었다. 대중전파매체를 통해 교회의 소식과 정보를 사회에 널리 전파하기 위해 여러 종의 잡지를 발행하는 한편 사회활동을 활발히 진행했다.
 1936년 7월 17일 난징대목구(代牧區) 주교에 임명되었다. 이는 중국 천주교의 선교사업 혹은 중국의 국제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인사였다는 평을 받는다. 명나라 말엽인 1599년, 이태리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난징성내에 조그마한 교당을 세우고 선교에 나섰다. 청나라 때인 1658년부터 난징은 중국 천주교 교무활동의 중심으로 자리했다. 이후 중국 천주교의 역사와 환경에 많은 변화가 있을 때도 난징이 차지하는 위치는 변함이 없었다. 중화민국이 난징을 수도로 정하면서는 난징대목구의 중요성과 상징성이 더욱 도드라졌다. 위빈이 난징대목구 주교에 임명된 것은, 바티칸이 얼마나 그를 중시하였는지 잘 보여준다.

민간외교활동과 지명수배
 위빈은 라틴어, 영어, 독일어, 불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등 11종 언어에 능통했다. 또한 언변이 뛰어나고 조직과 기획능력이 탁월하다는 평을 들었다. 주교라는 특수한 신분은 구미 각국 인사들을 움직일 수 있는 '무기'였다. 그가 가진 이런 장점들은 민간외교활동이 탁월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중일전쟁시기 8차례 출국하여 유럽과 미국의 2백여 도시를 돌았다. 전시 펼친 민간외교의 핵심은 중국의 항전에 대한 구미 각국의 동정과 지지를 이끌어내고, 난민구제 등 실제적인 도움을 이끌어내는데 있었다. 
 1938년 국민정부는 세계 각국을 상대로 구제 원조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대표단을 조직하고 위빈에게 대표를 맡아줄 것을 청했다. 출국을 앞두고 있을 때, 미국의 일부 친일파 인사들은 성직자인 그가 미국에서 정치적인 발언을 해서는 안 될 것이라며 여론을 조성했다. 이에 개의치 않고 도중 로마에 들러 교황에게 도움을 청했다. 교황은 "난민 구제를 위한 당신의 활동에 도움을 주는 이는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화답했다. 교황과의 담화 내용을 넌지시 기자들에게 흘렸고, 신문보도를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소식이 널리 전해졌다. 이는 미국에서의 활동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각 도시에서 순회강연을 통해 미국 조야가 중국 난민을 위해 구원의 손길을 내어줄 것을 호소했다. 그가 내건 '1달러의 구호금으로 중국 난민이 한 달을 버틸 수 있다'는 감동적인 구호는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중국의 전통문화를 각국에 소개하는 데도 주목했다. 1938년 방미 기간 워싱턴에서 중화문화협회(Institute of Chinese Culture) 성립을 발기했다. 문화협회는 후버(Herbert Clark Hoover) 전 대통령 등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성립되었다. 위빈은 일본에게는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만주국'의 경내에 있던 숙부는 1941년 살해되었고, 위빈은 지명수배되어 20만 엔의 현상금이 걸렸다.
 전시 민간외교활동은 국내에서도 진행되었다. 당시 중국에는 한국·월남(베트남)·필리핀 등 아시아 약소민족국가의 지사들이 각국의 독립자주와 아시아의 앞날을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 이들 인사들과 폭넓은 교류를 진행하였고, 이렇게 다져진 우의는 전후 중국이 아시아 여러 나라와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1942년 10월 11일, '한중문화를 발양하여 두 민족의 영구합작을 강화함', '한중호조를 촉진하여 동양의 영구평화를 수립함'을 종지로 한 중한문화협회 성립식이 충칭방송국에서 거행되었다. 평소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과 지지를 아끼지 않았던 위빈도 성립식에 참가하였고, 협회의 명예이사로써 한국독립운동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중국 전통문화와 천주교의 융화
 1944년, 위빈은 교황청에 중국인 추기경이 임명될 필요성을 역설했다. 건의가 받아들여져 1946년 2월 18일 톈껑신 주교가 중국인으로서는 처음이자 동아시아 출신의 첫 번째 추기경에 서품되었다. 두 달 뒤 교황청은 중국 천주교에도 정상적인 교구제도를 건립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위빈이 난징대교구 대주교에 임명되었다. 교황 바오로 6세(Paul Ⅵ)는 1969년 4월 28일 위빈을 중국 출신의 두 번째 추기경에 임명했다. 5월 19일 바티칸 성베드로대성당에서 거행된 서임식에서 새로 축성된 모든 추기경을 대표하여 답사를 했다.   
 추기경에 서임된 뒤 중국문화와 천주교 신앙의 결합을 대대적으로 추진했다. 대표적인 것이'제천경조'운동을 널리 펼친 것이다. 1939년 12월 8일, 교황청은 중국 천주교도들에게 가해졌던 공자숭배, 제천, 조상제사 등에 대한 금령을 해제했다. 이로써 3백여 년간 중국 천주교회의 최대 쟁점이었던 전례문제가 일소되었다. 이 과정에서는 위빈의 역할이 상당히 강하게 작용하였다. '인류문화의 근본은 하늘의 도리에서 연원한다'고 인식한 위빈은 중국의 전통인 제천의례의 회복을 주장하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1978년 8월 6일 교황이 선종했다. 전 세계의 추기경들이 교황의 장례 참가와 새 교황 선출을 위해 바티칸으로 모였다. 새 교황 선출을 위한 정식투표를 앞둔 8월 16일 위빈은 심장발작으로 사망했다. 93명의 추기경과 전 세계에 파견된 교황 대사들이 그의 장례에 참가했다. 유해는 26일 타이완으로 운구되어 28일 천주교 푸런대학(輔仁大學) 교내에 안장되었다.

김영신 교수(원광대 HK+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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