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타가 아리토모 / 출처 : 위키피디아
야마타가 아리토모 / 출처 : 위키피디아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등장 
 한국인에게 있어서 근대 일본군은 어떤 이미지일까요? 아마도 군국주의, 침략의 첨병, "천황 폐하 만세!", 자살 공격  등과 같은 이미지가 떠오를 것입니다. 사실 많은 일본인도 그와 같은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그만큼 1930·1940년대의 일본군의 이미지가 오늘날까지도 강렬하게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 육군을 창설한 사나이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소개할까 합니다. 그를 통해 일본군, 그중에서도 일본 육군의 출발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도쿠가와 막부 시대인 1838년, 야마구치 현에서 한 하급무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학문과 시 그리고 검술과 창술 등의  무술을 연마하며 자랐습니다. 그가 자라나는 시기는 격동의 시대였습니다. 1854년, 일본이 미 함대의 위협에 못 이겨 나라의 문을 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후 일본은 나라의 문을 닫아야 한다는 세력과 문을 열어야 한다는 세력으로 양분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개항과 서구화 문제를 둘러싸고 내전까지 벌어졌습니다. 이때 야마가타는 기도 다카요시, 다카스기 신사쿠, 이토 히로부미 등 고향의 동지들과 함께 군 병력을 지휘하며, 중앙 정부인 도쿠가와 막부의 타도에 가담했습니다. 야마가타와 그의 동지들은 이후 다른 여타 세력과 연합해 도쿠가와 막부를 쓰러뜨리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는데, 이것이 1868년에 출범한 메이지 정부입니다. 훗날 한반도를 침략하게 되는 정부이지요. 암튼 야마가타와 그의 고향 동지들의 '거사'는 성공했습니다. 그 결과 야마가타는 30대 초반에 메이지 정부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메이지 정부의 주도 세력은 과거에는 외세를 배격했었습니다. 하지만 점차 일본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서구를 본받은 근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근대화 정책을 강력하게 시행했습니다. 그중 서구식 군사력의 건설은 매우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당시 메이지 정부는 중앙 정부를 장악했을 뿐, 아직 정부 직속의 군사력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각 지방의 군사력을 해체하고 징병제를 통해 근대적인 군대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맡은 사람이 바로 당시 서구 시찰에서 돌아온 야마가타 아리토모입니다. 1870년, 야마가타는 일본 육군의 건설에 착수하게 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첫째, 야마가타는 징병제를 실시했습니다. 당시 징병제의 시행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도쿠가와 막부 때부터 무사 계급은 군인 겸 공무원 신분으로서 직업과 연금이 보장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징병제를 실시해서 민중들이 군인이 되면, 대부분의 무사들은 직업과 연금을 잃게 되기 마련입니다. 야마가타는 우선 현실과 타협했습니다. 그래서 기존의 군인들을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편성했습니다. 그 군사력으로 중앙정부의 권한을 강화한 뒤, 1873년 비로소 징병제를 시행했습니다. 이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분노했습니다. 무사 계급은 자신들의 직업과 연금이 사라지는 것에 분노했고, 농민들은 군대에 가기 싫다며 분노했습니다. 하지만 야마가타는 총칼을 동원해 저항 세력을 분쇄하며 징병제를 밀어 붙였습니다. 
 둘째, 야마가타는 독일식 군사제도를 도입했습니다. 그는 독일식 군사제도에 매력을 느끼고 적극적으로 독일의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특히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프랑스를 격파하고 독일을 통일하자, 독일식 개편은 대세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일본 육군은 독일식 조직체계, 내무생활의 강화, 철도를 통한 병력 이동, 도하 훈련 등 독일의 군사제도 및 전략·전술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독일의 군국주의도 도입되었습니다.

평양 공격을 묘사한 일본 측 그림 / 출처 : 위키피디아
평양 공격을 묘사한 일본 측 그림 / 출처 : 위키피디아

야마가타의 육군 건설
 셋째, 야마가타는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주입에 힘썼습니다. 야마가타는 장병들의 충성심을 이끌어내고, 군기를 확립하기 위해 천황에 대한 충성을 강조했습니다. 왜 야마가타는 군인들에게 천황에 대한 충성을 강조했을까요? 당시 일본은 봉건체제를 겨우 벗어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장병들은 신분의식과 지역의식이 강할 뿐, 국가(중앙 정부)에 대한 충성심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국가의 상징으로서 천황을 내세웠던 것이다. 그 외에 천황을 강조했던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민주주의, 자유주의 사상이 군대에 침투하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그래서 일본군이 '천황의 군대'라는 것을 더욱 강조했습니다. 
 야마가타의 육군 건설은 이후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요? 청일전쟁(1894∼1895)은 일본 육군이 우수하게 성장했다는 것을 증명해주었습니다. 당시 일본 육군은 우수한 총과 대포를 갖춘 7개 사단의 군대로 성장해 있었고, 장병들은 엄정한 군기를 통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습니다.  그렇게 일본 육군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난 걸까요? 
 야마가타가 도입한 정책은 이후 대내외 상황과 맞물려 나쁜 방향으로 작동했습니다. 특히 야마가타와 그의 동지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자 그런 방향은 더욱 뚜렷해졌습니다. 우선, 군국주의에 입각한 독일식 군사제도는 일본 육군을 더욱 경직된 분위기로 이끌었습니다. 그래서 문민통제를 거부하는 한편, 정치 간섭을 일삼았습니다. 그리고 천황제 이데올로기는 그와 같은 육군의 행동을 정당화했습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 본인은 권력자로 나름 평온한 말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85세까지 장수하며 1922년에 눈을 감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건설한 일본 육군이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고 9년 뒤, 만주사변이 발발합니다. 그 후 일본 육군은 파국의 길을 걸어갑니다. 

윤현명 교수(원광대 HK+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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