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서 물을 끓일 때 사용하는 주전자 '사모바르'
러시아에서 물을 끓일 때 사용하는 주전자 '사모바르'
러시아에서 큰 사랑을 받고 있는 '도시락면'
러시아에서 큰 사랑을 받고 있는 '도시락면'

 

인간의 식문화는 특정 지역의 기후와 지리적 특성, 종교, 관습 등의 포괄적인 영향을 받아 형성되는 것이다.

 고대 러시아인 식문화의 중심에는 '카샤'와 '블린'이 있었다. 카샤는 죽으로 호밀과 보리, 귀리 등으로 만들었고, 결혼식의 중심 음식이었으며 전쟁 시 평화를 상징하기도 했을 정도로 중요했다. 블린은 팬케이크로 러시아인이 기독교 세례를 받기 전 믿었던 토속신앙의 영향으로 태양을 닮은 둥근 모양이었다. 빵과 소금은 외부인을 환대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어 하나의 예식이 되었다. 쟁반에 둥근 빵과 소금을 얹어 환대의식을 치르는 것을 '흘례바쏠리예(빵과 소금)'라고 부르며 이러한 환영의 방식은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기독교 수용 이후에는 7개월이나 이어지게 된 육식 금지 기간에 부족한 영양분을 보충하기 위해 캐비어가 러시아인의 식탁에 오르기 시작했다. 몽골과 같은 아시아권의 영향을 받은 후에는 면과 만두, 차(茶)문화가 널리 사랑받기 시작했다. 1440년대~70년대에는 호밀로 만든 보드카도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후환경, 농업기술 문제 등으로 인해 러시아인의 식문화는 상대적으로 소박하고 단순했다. 

 이런 러시아 식탁이 보다 풍요롭고 다양해진 것은 18세기 표트르 대제와 예카테리나 2세가 구가한 찬란한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대부터이다. 커피, 포도주, 샴페인, 초컬릿, 담배, 케이크 등이 귀족의 파티를 더욱 다채롭게 했고, 유럽에서 데려온 외국 요리사들과 함께 새로운 수프와 커틀렛, 샌드위치 같은 음식들이 대거 등장했다. 19세기 나폴레옹과 러시아의 전쟁 이후에는 한 상에 모든 음식을 차리지 않고 식전주와 전채요리부터 시작해 디저트까지 순서대로 음식을 내오는 러시아식 식사습관이 유럽에까지 퍼지게 되었다. 

 이외에도 첨가물이 들어가지 않는 순수한 유제품과 유산균 제품으로 전통 아이스크림과 케피어, 사워크림인 스메타나 등이 유명한데 러시아 국내산은 모두 품질이 매우 높아 건강에 좋은 것이 특징이다. 

 러시아인의 차 사랑은 매우 특별하다. 유럽에서 물의 석회질 성분 때문에 맥주나 와인을 많이 마셨다면, 러시아인은 차를 마셨다. 하루종일 물이 끓고 있는 '사모바르'라고 불리는 찻물 전용 용기를 활용하여 차를 마셨는데, 겨울이 긴 만큼 비타민 섭취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차에 레몬을 한 조각 띄워 먹는 레몬티의 원조가 러시아이다. 러시아인의 찻물은 팔팔 끓여 매우 뜨겁기 때문에 차를 다 마시고 마지막에 노골노골 삶아진 레몬까지 먹어치우는 것도 색다른 맛이다. 사약처럼 진하게 우린 차와 함께 달콤한 초컬릿이나 케이크를 먹거나, 러시아 숲에 지천인 온갖 베리류로 만든 잼을 빵이 아닌 차와 함께 먹는 것 역시 재미있고도 맛있는 러시아식 차 문화이다. 

 요새 러시아인들은 맥주를 더 선호하는 추세지만 보드카는 추위가 심한 러시아에서 오랫동안 사랑받은 술이다. 보드카는 무색, 무미, 무취가 특징으로 여러 칵테일의 베이스주를 담당 할 만큼 깔끔한 맛을 자랑하지만, 역시 추운 곳에서 마셔야 알코올 냄새 없이 제맛을 즐길 수 있다. 기온이 영하 20°로 떨어지는 한겨울 친구들과 보드카를 마시며 뜨거운 러시아식 사우나를 즐기다가, 미리 얼음에 구멍을 파놓은 호숫가나 강가에서 냉목욕을 즐기는 것이 러시아식으로 겨울을 나는 방법 중에 하나이다. 러시아보다 추위가 덜한 곳에서 마실 때는 보드카를 냉장실이 아닌 냉동실에 며칠 넣어놨다가 얼듯 말듯한 상태로 차갑게 마시면 훨씬 깨끗한 맛을 즐길 수 있다. 러시아에서는 맥주나 보드카를 천연 냉장고인 눈 속에 파묻어 놓았다가 마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보드카의 가장 기본적인 도수는 40°로 독주에 속하는 만큼 고단백, 고지방 안주를 곁들여야 위장을 보호할 수 있다. 돼지의 살코기와 비계를 소금, 후추, 마늘 등에 절여 굳힌 '살로'나 버터와 레드 캐비어(연어알)를 얹은 빵 등이 꽤 잘 어울린다. 그러나 사실 신선한 러시아 오이나 흑빵처럼 가벼운 안주와 먹어도 어울리기는 한다. 위장이 걱정일 뿐. 

 최근 한류는 K-food, K-drama, K-pop, K-beauty 등등의 이름을 달고 종횡무진 세계인의 사랑을 받으며 대한민국의 이미지 제고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러시아도 모스크바와 시베리아·극동 일부 지역을 중심으로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한식 역시 덩달아 인기를 끌고 있지만, 사실 러시아에서 한국제품은 이미 1990년대~2천년대부터 사랑받기 시작했다. 특히 '도시락면'의 성공은 놀라운 수준이다. 국내에서는 오래전 이미 단종되었던 제품이 러시아 시장에서의 큰 성공에 힘입어 거꾸로 한국에서 재출시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러시아에서는 이제 '도시락'이라는 명칭이 컵라면을 총칭하는 일반명사로 쓰일 정도이다. 먹는 방법은 현지화되어 닭고기 맛, 버섯 맛, 김치 맛 등 여러 종류가 있는데, 마요네즈를 잔뜩 뿌리고 계란프라이나 훈제 햄을 얹고 빵을 곁들여 칼로리 폭탄을 만들어 먹는다. 

 모스크바와 시베리아·극동 지역에서는 한식당이 인기를 끌고 있는데 한류 붐을 타고 한식이 건강식이라는 이미지가 생기면서 많은 현지인이 즐기는 외식문화 중 하나가 되었다. 외국인에게 김치나 찌개류처럼 냄새로 인해 한식이 호감을 얻지 못하던 시절을 생각하면 외국 항공사의 기내식에 김치가 포함되기도 하고, 외국인들이 젓가락질을 자연스럽게 하고, 건강식으로 각광 받게 된 시대적 변화가 흥미롭기도 하다. 한식문화에서 한 가지 아쉬웠던 점으로 세계화가 어려웠던 요인 중 하나였던 국물류나 반찬을 덜어 먹지 않고 여럿이 함께 먹는 한국 특유의 식습관이 점차 위생적으로 변하고 있는 점 역시 환영할 부분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미국의 전방위적 대러 제재조치라는 극단의 진영싸움 속에서 30년간 러시아에서 탄탄히 쌓아 올린 경제적, 외교적 성과를 뒤로하고 많은 우리 기업들이 눈물을 머금고 러시아 시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국 담배와 음식은 오히려 그 인기가 줄어들지 않은 채 언젠가 한국과 러시아가 다시금 평화로운 협력파트너로 재회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한국 드라마와 영화 속 한국문화, K-pop 스타의 일상 다큐나 유튜브의 '먹방' 콘텐츠 속 K-food를 보고 자란 러시아의 청소년과 청년세대가 과거에 비해 한국을 보다 친밀한 국가로 느끼는 만큼 이들이 언젠가는 한-러 평화에 큰 가교 역할을 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 문화의 힘이란 그 어떤 정치적 활동보다 은근하지만 강하고 긴 생명력을 가진 것이기 때문이다. 

 김자영 교수 (원광대 HK+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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