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이나 거리 등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 불려지던 샹송은 18세기에 이르러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동아리를 만들어 정기적인 모임을 갖게 되면서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샹송을 부르고 들을 수 있는 일정한 공연 장소나 기회가 없었다.


1729년,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던 샹소니에 앙투안느 갈레(Antoine Gallet)가 주도하여 '카보 Caveau'(보통명사로 쓰일 때는 지하실의 작은 방을 의미함)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그는 매월 첫째 일요일 자기 집 지하실에서 샹송을 들려주는 저녁식사에 친구들을 초대하였다. 회식자들은 식사를 하면서 돌아가며 재미있는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친구들 외에도 시인, 극작가 등이 이 모임에 초대되었고, 그들은 클럽을 결성하고 주기적으로 모이기로 결정하였다. 주로 시인이나 문학자들이 회원인 이른바 샹송 클럽이 만들어진 것이다.


카보에서 발표된 샹송은 매년 책으로 출판되어 민중들에게 알려졌다. 당시 카보가 배출한 샹소니에 중에서 피에르 장 드 베랑제(Pierre Jean de Boulanger)가 유명했다. 그는 1815년 루이 18세가 돌아오자 자유를 찬양하고 앙시엥 레짐(구체제)을 증오하는 노래를 불렀다. 왕정복고에 반대하는 그는 두 차례나 투옥되었지만, 오히려 그로 인하여 그는 더욱 더 유명해졌다. 그의 노래는 샹송의 특징 중의 하나인 민중의 뜻을 대변하는 소리가 되었다. 그가 부른 노래책은 일주일 만에 1만 부가 팔릴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그는 샹송을 단순한 여흥을 위한 노래에서 벗어나 서정단시(抒情短詩)의 차원으로 끌어 올렸다. 그는 샹송에서 애국적인, 철학적인 주제를 다루었고, 감정의 고귀함에 리듬의 조화, 드라마의 격렬함과 흥미를 연결시킬 줄 알았다는 평을 받았다. 1739년 갈레의 파산으로 카보가 해체되었으나,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여러 개의 카보가 샹송을 발전시키고 보급하는 역할을 이어갔다.


프랑스 역사의 󰡐황금시대(벨 에포크 Belle Epoque)', 즉 파리 만국박람회가 열린 1889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에 이르는 시기에, 󰡐카보'의 뒤를 이어 '카페 콩세르(cafe concert)󰡑와 󰡐카바레(cabaret)'가 등장하며 샹송은 비약적으로 발전, 보급되었다. 파리의 카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자 각 카페들은 서로 경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카페끼리 경쟁이 심해지자 손님을 끌어 모으는 방법의 하나로 생각해낸 것이 샹송을 들려주는 카페였다. 이것이 일종의 라이브 카페인 카페 콩세르의 시작이었다. 아직 축음기나 라디오가 보급되기 전이라 이런 공간들은 거리의 가수들에게 고정되고 안정된 장소, 즉 직장을 제공했으며, 이제 샹소니에들은 거리를 방황할 필요 없이 안정된 수입을 바탕으로 샹송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파리시 탕플 거리의 '카페 아폴롱(Cafe d'Apollon)'도 카페 콩세르 중의 하나였다. 이 카페가 성공을 거둔 이후, 요금이 저렴하여 부유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가난한 노동자들도 출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카페 콩세르는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샹소니에들은 계약을 맺고 저마다의 카페에 출연했으며 그들 중에서 인기 스타가 탄생하였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과 같은 직업적인 샹송 가수가 나타난 것이다. 카페 콩세르가 배출한 대스타 중의 한 사람은 '이베트 길베르(Yvette Guilbert)'라는 여가수였다. 길베르는 근대 샹송의 창법을 확립한 위대한 샹소니에였다. 가사의 내용을 존중하면서 리듬을 살려 풍부한 시정을 자아내면서, 노래함과 동시에 이야기하는 듯한 현대풍 샹송 창법을 확립하여 후배 가수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카페 콩세르와 함께 샹송의 발달에 공헌한 것이 카바레였다. 샹송과 풍자적인 시사희극이나 쇼 등을 듣고 보면서 식사도 할 수 있는 공간인 카바레는 1878년 10월 11일 소설가이자 시인인 에밀 구도(Emile Goudeau)가 󰡐물 치료의사 서클 Cercle des Hydropathes'라는 특이한 문학 동아리를 만들어 모임을 갖기 시작하면서 샹송의 발전, 보급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하였다. 시인, 음악가, 화가, 배우 등이 이 동아리의 멤버들이었다. 그들은 로돌프 살리(Rodolphe Salis)가 몽마르트르 언덕에 문을 연 '샤 누아르 Le Chat noir(검은 고양이)'라는 카바레로 자리를 옮겨 모임을 이어 갔다.

조영철 (유럽문화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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